2020년 잉청저우 제도 연방 행정구역 개편

From 더 스토리즈 대피소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민주의 여명 세계관 틀.png 이 문서는 민주의 여명 세계관을 구성하는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대체역사 장르의 세계관인 민주의 여명 세계관을 구성하는 문서로써, 모든 것은 허구의 설정이나, 세계관 설정의 구성을 위해 일부 현실의 것을 변형 혹은 확대한 설정이 있을 수 있으며, 이 문서의 기여 및 그 철회에 대한 권한은 민주의 여명 세계관을 연재하는 미르체아 지우르지우에게 있습니다.

2020년 잉청저우 제도 연방 행정구역 개편은 2020년 4월 23일 확정되어, 2020년 9월 12일 지방자치체 및 지방행정부의 17차 행정부/자치체 출범과 동시에 효력을 갖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행정구역 개편이다.

중정구와 기타요시구의 구명 개칭(잉청저우 직할시)[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직할시에서는 처음으로 연방 헌법과 시 헌법에서 규정한 행정구역명 변경을 실시하였고, 그 대상은 중정구와 기타요시구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 내용을 보면 될 것이다.

중정구 : 외성인이 부정부패를 저질러서 붙인 이름, 30년만에 폐기처분[edit | edit source]

중정구는 1990년 잉청저우 1차 대확장 당시에 편입된 잉서우 진의 남부를 중구의 일부와 합쳐서 만든, 비교적 최근에 생긴 구이다. 이 구가 만들어질 1990년은 친 중화민국 성향의 구명민 전 연방총통의 최측근이었던 궉쉥터이[1]가 잉청저우 시장으로서 재임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구명을 멋대로 확정하려고 했던 1990년 잉청저우의 1차 대확장을 이끌어 낸 직후 실시한 행정 개편 당시에 투표를 통해 중구 몇개의 동부 리를 떼어 내어, 동시에 편입지 중에서 옛 잉서우 진의 남부 돌출부와 합치면서 이 구를 만들도록 할 때의 당시 상황은 신도심의 개발을 통해 외성인이 우세한 환경이 만들어졌음에도 1970년대의 대화해 상황으로 인해 외성인의 상당수, 아니 어쩌면 절대 다수로 99% 이상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택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그가 친 중화민국 성향으로서 1978년 사망한 장제스를 기리겠다는 이유로, 구명을 중정구로 붙이는 것을 어떻게든 밀어붙이겠다고, 시민들에게 과도한 금액의 선물을 통한 회유를 통해 구명을 붙이도록 사실상 금권 주민투표를 주도해 중정구라는 이름이 붙어서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 연방염정부는 유명무실한 기관이 아닌 이상, 궉셍터이가 주도한 이러한 구명 획정 투표에 개입한 사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었고, 결국 1990년 어느 내성인 출신 중정구민의 의구심에 따른 신고를 받고 구명 획정 투표 금권개입 관련 수사를 시작한 지 5년이 지난 1995년 연방염정부가 이러한 개입이 모두 사실이라고 조사 결과를 내리면서 그 내막이 드러났고, 그에 모든 중정구 구민이 궉셍터이의 부정부패가 만든 구명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연서를 작성, 그에 따라 1998년 구명 개정 논의를 시작했음에도 20년 동안 논의가 소강상태와 진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2018년에 중립적이고 옛 지명을 살린 난잉서우(南英壽) 구로 개명할 구명을 확정짓는 데에 성공했고, 해당 개명을 2019년 주민투표에 부쳐, 2020년 연방입법위원 선거와 같이 치러지는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으며, 총선과 같은 투표율에 유효표가 그 중 98.9%, 그 중에서도 8만 7천여표의 차이로 찬성이 우세하여, 과반 투표 과반 찬성의 원칙에 따라 난잉서우 구로 개칭하기로 결정, 2020년 7월 24일 개헌 국민투표 등을 통한 관련된 잉청저우 직할시 헌법 개헌절차까지 완수하며 이를 획정했다.

기타요시구 : 구명의 류큐어화 - 시대 변화의 반영[edit | edit source]

기타요시구 일원은 잉청저우 섬이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던 1920년대 후반부터 제정 일본에 반대하는 일본 출신 반체제[2] 인사들과 제정 일본 하에서 고통받으며 고달픈 삶을 산 류큐인이 정착하던 곳 중 하나이며, 암흑의 피(暗黑之血) 중에서 일본인의 정체성을 택한 소수가 장성하면서 독립하는 과정에서 한족이 주로 살던 잉청저우 시와 그 주변에서도 잉청허 이서의 지역에서 환영받지 못함으로 인해 기타요시구로 거주지를 정하는 현상이 불었고, 그로 인해 1980년대까지는 이러한 일본 출신 반체제 인사의 후손과 암흑의 피(暗黑之血) 중에서 일본인의 정체성을 택한 소수를 합친 일본계 잉청저우 섬 주민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베이비붐에 의해 류큐계가 기타요시구 일원에서 수를 불리게 된 상태에서, 1998년 2차 대확장 당시 아키나카 구 일대가 잉청저우로 편입되어 개발된 이후로 기타요시구 일대에 많은 수의 류큐계가 유입되고, 일본계가 아키나카 구나 신잉청현 북부의 스기 시, 세이란 시 등으로 대거 유출되면서, 2004년 일본계의 인구를 추월, 그러한 상황에서 내성인과 외성인까지 일부 섞여있는 상태가 되며, 기타요시구 일원에서 민족 비율이 50%를 넘는 민족이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제1민족이 된 류큐인의 언어인 류큐어로 구명을 개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는 여론이 200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으며, 2015년 기타요시구의 구명을 류큐어로 의역한 니시시구로 개명할 구명을 확정짓고, 3년의 토론을 거쳐 2018년 주민투표에 부쳤고, 2020년 연방입법위원 선거와 같이 치러지는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으며, 총선과 같은 투표율에 유효표가 그 중 99.6%, 그 중에서도 36만 9천여표의 차이로 찬성이 우세하여, 과반 투표 과반 찬성의 원칙에 따라 니시시 구로 개칭하기로 결정, 2020년 7월 24일 개헌 국민투표 등을 통한 관련된 잉청저우 직할시 헌법 개헌절차까지 완수하며 이를 획정했다. 다만, 한자문화권에서 언어별로 한자의 읽는 법이 제각각 달라 한자음이 다른 특성으로 인해 공식 구명 이름의 언어만 개칭/개정되며, 한자로 표기하는 이름은 북길(北吉)로 유지된다.

통합 장이시의 분열 : 장이 시와 시낭 시의 통합 28년만의 결별(신잉청현)[edit | edit source]

시낭 시와 장이 시를 비롯한 신잉청현 북부 12개 현할시는 1960년대 이후로 잉청저우 직할시가 급격히 팽창하는 상황 속에서, 잉청저우 직할시에 몰리는 인구와 대학 외 시설을 분산시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그 주변 위성도시로써 온갖 신도시와 택지지구, 고층농장단위지구가 개발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이러한 개발이 거의 완료되어 가는 1980년대 이후에는 완전한 대도시권으로서 시가지 연담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시낭 시와 장이 시 역시 시가지 연담화에 따라 발생한 구역 간의 관할 문제가 불거졌으며, 이로 인해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현할시 간의 협력체를 사용하는 방식이 아닌 행정통합을 실시하는 방식을 채택, 1992년 2월 주민투표에서 통합을 결의함을 통해, 1992년 7월에 통합 장이 시를 출범하는 식으로 통합하였다.

하지만, 통합으로 시가지 연담화에 따른 관할 문제의 해결을 위한 통합이었고, 통합 이후에 시낭이라는 이름을 강제로 내리도록 하며 옛 시낭 시 지역을 시낭으로 칭하지 않고 난제투(남계토, 南界土)로 칭하면서 격하시킨 만큼, 옛 시낭시의 주민들과 원래의 장이 시 주민들의 갈등과 시의회에서의 소지역주의에 따른 이권 다툼은 필연적이었으며, 젊은 세대마저도 옛 시낭 시 주민의 후손이냐, 원래의 장이 시 주민의 후손이냐에 따라 가려 사귀는 등의 일이 일어나고, 재개발 및 그 과정에서의 시가지 및 도로망/수도망/전력망 정비로 본래의 장이 시와 옛 시낭 시 지역의 경계가 도로가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해당 지역에서는 분리 상태에서도 구역 간 관할 문제의 해결에 답이 보일 듯 하다고 생각하게 되며 재분리를 2020년 3월에 주민투표로 부쳤고, 2020년 주민투표에서 투표율 100%를 보이면서 찬성 96.7%, 반대 3.3%의 결과로 해당 안건이 통과되며, 장이 시와 시낭 시는 통합 28년만에 평화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잉청저우 섬 남부 향진군(鄕鎭群)의 대규모 관할구역 조정 및 분할(신잉청현)[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는 잉청저우 섬 남부의 향진군에 대해 1956년 건국 당시 국민당군과 미국 속령 당국으로부터 행정에 대한 승계를 받으면서, 행정구역 조정이 없이 1940년대 후반 중화민국 점령 시절에 국민당군이 산지 분포를 보고 멋대로 지정한 잉청저우 섬 남부 향진군의 경계를 그대로 승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산지 분포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는 잉청허의 강 흐름이 지난 수십년간 급격히 바뀐 것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 드러남을 통해, 또한 그 사이 나부샤 진과 틴샤 진, 양뉴 진의 진 지역은 산악 지역의 마을들을 제외하고 하나의 시가지로 뭉치는 새에, 향들에서는 한 향 내에서 추가로 마을이 개척되며 생긴, 행정에 대한 추가적인 불편 등의 향진군의 주민들이 이러한 행정경계 불안정으로 인해 오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행정구역 개편을 1990년대 후반부터 요청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안징후이 연방총통이 신잉청현의 현지사로 재임하던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실증 사업 및 용역을 완료, 2017년 향진군의 대규모 관할조정 및 분할을 확정지으며 주민투표에 부쳤다. 하지만 기존 경계에 익숙해진 일부 주민의 반발에 의해 2020년 100%의 투표율에 찬성 64.6%, 반대 35.1%, 무효표 0.3%라는 결과가 나왔으나, 과반 이상 투표의 과반 이상 찬성의 원칙에 따라 이번 개편에서 잉청저우 섬 남부 향진군의 대규모 관할구역 조정 및 분할이 이뤄질 예정이다.

이로서 탄생하는 향은 다음과 같다.

  • 안밍(岸明) 향 - 기존 양칭 향의 북부와 우싱 향의 남서부 회랑, 커칭 향의 서부 일부를 합침.
  • 나카틴 향 - 기존 양칭 향의 남부와 기존 틴샤 진의 북부 일부를 합침.
  • 이칸타 향 - 기존 틴샤 진의 서부 대부분을 분할함.
  • 마타나오 향 - 기존나부샤 진의 북서부 일부와 기존 틴샤 진 북동부 일부, 기존 양칭 향의 남부 일부를 합침.
  • 중구(中谷) 향 - 기존 커칭 향 남부 대부분과 기존 양칭 향 동부 대부분과 기존 나부샤 진의 북부 일부, 기존 이린 향의 서부 일부를 합침.
  • 화안(華岸) 향 - 기존 잉펑 향 동부를 분할함.
  • 둔칭(屯靑) 향 - 기존 이린 향 남부 대부분과 기존 잉펑 향의 남서부 돌출부를 합침.
  • 탄링(灘凌) 향 - 기존 웨이칭 향 동남부와 기존 잉펑 향 동부 돌출부를 합침.
  • 통핑(通平) 향 - 기존 웨이칭 향 북동부를 분할함.


이외에도, 나부샤 진이 이린 향의 일부를 편입하고, 우싱 향이 커칭 향의 북부 일부를 편입했으며, 이린 향은 잉청허 이북 지역을 웨이칭 향과 커칭 향에 내어주었고, 잉펑 향은 서부의 극소 돌출각을 탄링 향에 내어주었으며, 커칭 향은 웨이칭 향, 양칭 향과의 경계를 재조정하며 극히 일부를 웨이칭 향에 내주는 대신, 양칭 향과 웨이칭 향에서 그 배의 영역을 가져왔다.

연방특별구 제도와 해청위 연방특별구의 폐지, 해청위 현의 신설[edit | edit source]

1980년대에 잉청저우 시 300만명에 지금의 신잉청현에 해당하는 시낭/웨이칭 양 현의 인구의 합이 8백만명이라는 과히 심각한 수치의 과밀도가 나올 정도로 인구 급증 및 집중이 심화되었고, 좀만 더 심했으면 더는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 불가능했을 뻔 했으며, 이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의 추가 지출을 초래하였다.

이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방행정원 산하에 임시위원회로써 신수도조성위원회가 1981년 12월 출범, 곧바로 신수도 조성지를 6곳 꼽아서 입지 선정 등에서 경합을 벌인 끝에 1983년 9월에 지금의 해청위 연방특별구 자리를 신수도로 지정해, 1985년에 조성 공사에 들어가 1990년까지 조성한 뒤에 해청위 연방특별구를 연방총통령에 근거하여 출범시킴과 함께 연방특별구 제도가 형성되었으며, 수도 외에도 국가 정책에 의해 도시나 그 근교를 형성시킨 지역에서 국가의 관리가 필요한 지역에도 연방특별구를 출범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연방특별구 제도가 미국의 워싱턴DC 만큼이나 지방정부의 권한이 낮은 것은 아니나, 지방정부의 권한이 다른 연방주체의 지방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상황으로서 운영되는 것이 해청위 지역 주민들에게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결국 2000년대 후반까지 참다참다 못한 해청위 연방특별구의 주민들이 10년 넘게 "우리는 베를린과 같이 타 현과 동등한 주가 되고 싶다!"고 매일 시위하기에 이르렀고, 2019년에는 이 시위에 참여한 인원이 역대 최다인 40만명[3]을 기록했을 정도였다.

베를린은 도시주였고, 해청위는 면적만 작은 도농복합의 지역이었다는 차이 뿐이었지, 수도 지역이었어서 수도주로써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여론이 커졌고, 결국 연방정부와 연방입법원, 국민대회는 이를 수용하여, 국민대회에서 해정위 현을 신설하고, 헌법의 수도 조항의 해청위 연방특별구를 해청위 현으로 고치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해청위 연방특별구는 해청위 현으로 개편, 다른 연방주체의 권한과 동등한 권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연방특별구 제도는 폐지되었다.

각주[edit | edit source]

  1. 郭箱邰. 일생동안 광둥어를 쓴 데서 알겠지만, 잉청저우 외성인 출신이다. 한국어로 곽상태, 대만민난어로는 퀘슌타이, 하카어(객가어)로는 곡숑타이
  2. 제정 일본에 반대한 공화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이념을 가진 인사를 의미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종말이 잉청저우로의 반체제 인사의 이주를 부추긴 것이다.
  3. 해청위 연방특별구 인구의 1/3에 조금 못 미치는 수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