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이스트코스트 독립 주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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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제도 자치령 독립 주민투표
1956년 3월 20일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제도 자치령은 단계적인 독립 이행의 수행을 완수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제도 자치령은 반드시 독립해야 하는가?
결과
찬성 / 반대 퍼센트
찬성 531,800 77.66%
반대 153,015 22.34%
유효표 684,815 100%
무효표 0 0%
총 투표 684,815 100.00%
투표율 94%
유권자수 728,515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 제도 속령 지역별 결과
파일:이스트코스트 독립투표 1956.png
     찬성     반대

참조 : 지도의 색상 채도는 찬성률/반대율을 나타낸다.

1956년 이스트코스트 독립 주민투표(영어: 1956 Independence Referendum Commonwealth of Eastcoast and Bashi Islands, 오키나와어: 1956年 米領 東岸與巴士諸島 獨立 主民投標)는 1956년 3월 20일에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제도 자치령에서 벌어진 주민투표이다. 이 주민투표에서 77.66%의 압도적인 독립 찬성에 의해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제도 자치령이 독립하면서 이스트코스트 임시의회국을 성립하였고, 결국 단수이 협정과 함께 잉청저우 제도 연방 성립의 근거로서 작용하게 된다.

주민투표 과정 이전의 상황[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이스트코스트[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로 제정 일본은 제국주의에 파시즘적인 군국주의를 결합, 당시 제정 일본의 입장서 류큐 제도와 인접하였기에 침략 및 군사 전략에 용이하다고 여겼던 이스트코스트는 결국 1942년 4월부터 시작된 이스트코스트 전투를 통해서 1942년 7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에 즉각 일본군의 잔악함에 반발한 이스트코스트 주민들은 반일감정이 있던 한인들을 중심으로 게릴라 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제정 일본의 이스트코스트 점령 군정부가 이스트코스트를 식민지와 같이 통치하려고 들면서, 한인들과 친분이 있던 미국계를 시작으로 그에 대한 보복에 들어가려고 시도하자, 차차 많은 미국계도 이 게릴라 전쟁에 한인들과 같은 레지스탕스로 참여하게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 낮에는 일장기를 걸고, 밤에는 성조기나 태극기를 걸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라 2년 간의 치열한 싸움과 전쟁 말 공습에 힘입어 1944년 10월 일본군을 가까스로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사이 일본은 이스트코스트의 시민을 학살, 강간, 강제징용하는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결국 전쟁 직전 인구 70만 중 전쟁학살 피해 6만, 게릴라 전사 3만, 강간피해자 4만명, 강제징용 피해자 2만명, 원치 않은 혼혈아 4만명 등을 남기며 전쟁 말의 공습 등과 함께 인명피해 외에도 수십년을 일군 시가지가 일부 콘크리트조 중층 건물을 제외하고 잿더미나 돌더미로 변하는 등의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이스트코스트 시민들은 그런 끔찍한 전화의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인과 미국계가 손잡고 그렇게 다시 악착같이 일어나면서 베이비붐이 불어왔으며, 제정 일본에 있던 한인의 상당수가 한국으로의 귀국 내지는 이스트코스트로의 이주를 선택하면서 한인 인구가 추가로 유입, 이에 따라 어떻게든 전후복구를 빠르게 끝마치려고 누력했으며, 이로서 1950년에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시민들은 풍요로움을 누림과 동시에 독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단계적 독립 방안의 실시[편집 | 원본 편집]

전후 이스트코스트 시민의 애향심은 극도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때마침 풍요 속에서 독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이스트코스트의 주민들에 의해, 이러한 애향심은 어떻게든 독립을 이뤄내야 한다는 절박함에 의해 독립 촉구의 원인으로 승화하였다.

그와 동시에, 옆 동네에 가까웠던 잉청저우 섬의 상황이 시시각각 이스트코스트로 알음알음 전달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미국 의존보다는 독립을 해서 중화민국을 향해 변화를 이끌어내고, 잉청저우 제도 전체의 독립을 이뤄내야 한다는 사상이 만들어지면서 잉청저우 섬 주민들과의 의견의 일치를 보이면서 알게 모르게 독립 여론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미국은 전후에 이를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필리핀의 단계적 독립 방안의 재개에 이어, 카이로 선언 및 얄타 회담에서의 확정 사항을 이행하고자, 이스트코스트 섬과 동도현 지역에 해당한 이스트코스트 속령에 바시 제도를 편입한 상황에서 잠재적으로는 이스트코스트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점을 인지했기에, 종전 직후인 1945년 10월에 단계적 독립방안을 제안하였으나, 이스트코스트 속령 당국에서 전후 복구 이후까지 연기를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여, 전후 복구가 끝나는 1950년까지 단계적 독립 방안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1950년 전후 복구를 끝마치자 마자 풍요의 시기로 들어간 이스트코스트에서 독립여론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급격한 고도경제성장의 지속을 예측한 미국 정부는, 1950년 9월에 이스트코스트 속령을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제도 자치령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제도 자치령에 국방권 및 외교권을 제외한 광범위한 자치권을 몰아넣으면서 단계적 독립 방안을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자치정부의 임기를 4년으로 정함과 함께 이러한 자치령이 성립된 바로, 미군정이 종료되고, 미국의 권력은 필리핀의 단계적 독립방안과 같이 이스트코스트와 그 주변 제도의 정치에서 내려왔으며, 자치정부는 수립 즉시 독립 여론에 따라 독립 주민투표의 개최 및 독립을 위한 역량의 강화에 힘썼으며, 이는 결실을 맺었다. 주민들은 민주 연방국가 수립론을 들고 오며 잉청저우 제도 자체의 연방국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 측에서도 이르긴 하지만, 빠른 역량 강화 속에서 주민 대부분이 독립에 동조하고 있기에 1956년 3월에 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투표 과정[편집 | 원본 편집]

투표는 1955년 12월 3일에 투표 제반사항이 공고됨과 동시에, 그 다음날인 동년 12월 4일부터, 투표물품 확인 등의 투표 준비 과정을 거쳤고, 1956년 1월 4일부터 투표 찬반 운동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독립 찬성 여론이 거센 상황에서 투표 찬반 운동 내내 독립 찬성 진영이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반대 진영은 날이 갈 수록 위축되었다.

그 이후 1956년 2월 20일까지 유권자 등록을 받았고, 이에 모든 유권 대상자가 유권자로 등록했으며, 3월 20일에 투표를 실시하였다. 주민투표에 전 유권자의 94%가 투표한 상황에서, 개표가 시작된 이래로, 독립 반대가 높았던 투표소가 먼저 개표된 초반 30분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독립 반대가 독립 찬성을 압도하지 못했으며,1956년 3월 20일 오후 11시에 독립 찬성이 유력해졌고, 다음날 오전 4시에 개표가 완료됨과 동시에, 77.66%의 압도적인 독립 찬성으로 결과가 나오면서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제도 자치령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투표 이후[편집 | 원본 편집]

해당 주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의 찬성을 통해서 독립 쟁취를 확정지은 상황에서, 미국 의회로 해당 주민투표 결과가 발송되면서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 제도 자치령에 대한 독립법안"이 1956년 4월 26일 상정, 동년 5월 9일에 상하원 표결을 통과하면서, 이스트코스트는 독립에 성공한다. 그러면서, 동년 5월 26일에 이스트코스트 임시의회가 주민들의 직선을 통해 구성되면서, 이를 통해 이스트코스트 임시의회국이 성립, 동년 8월 9일에는 단수이 협정이 비준 전에 사실상의 실효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를 인정받고자 당사국이 모두 비준함과 동시에 잉청저우 제도의 대통합이 실시되면서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수립 과정을 동년 12월까지 거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