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청저우 제도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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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청저우 제도 연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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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영성주취청 | ||||
![]() 행정구역도 | |||||
수도 | 해청위 | ||||
최대 도시 | 잉청저우 | ||||
정치 | |||||
총통 | 안징후이 | ||||
부총통 행정원장 입법원장 사법원장 감찰원장 고시원장 국민대회 의장 |
미자와 요시헤이 샬로-팔나-안다리 타카츠키 마사우치 왕수이서우 양민영 샤를 플뢰르 하인리히 슈미트 | ||||
역사 | |||||
정부수립 | |||||
• 단수이 협정 | 1956년 7월 20일 | ||||
• 이스트코스트 독립 | 1956년 5월 9일 | ||||
• 잉청저우 제도 대통합 | 1956년 8월 9일 | ||||
지리 | |||||
면적 | 21,603 km2 | ||||
시간대 | YWST(잉청저우 직할시, 신잉청현, 이스트코스트 직할시), YEST(동도현, 해청위 연방특별구)[8] (UTC+8(YWST), +9(YEST)) | ||||
인문 | |||||
공용어 | 잉청저우표준화어(대만 궈위(대만식 표준중국어)의 잉청저우식 변형), 한국어, 일본어, 영어, 잉청저우어(잉청저우 원주민어) | ||||
국어 | 한국어? | ||||
지역어 | 광둥어(廣東語), 오어(吳語), 대만민난어(臺灣閩南語), 하카어(客家語), 잉청저우 산둥관화(瀛城州 山東官話), 필리핀어, 류큐어(琉球語) | ||||
데모님 | 잉청저우인 | ||||
민족 분포 |
한족 56.8% (대만 외성인 18% (월인 9.1% 오인(저장-장쑤-상하이인) 5% 산둥인 3.9%) 대만 내성인 38.8% (복로(푸젠)인 21.3% 하카(객가)인 17.5%) 미국계 13.9% 일본계 4.5% 류큐계 4.3% 잉청저우 원주민(잉청저우인) 7.7% 한국계 9.4% 필리핀계 3.8% | ||||
인구 | |||||
2020년 어림 | 28,684,303명 | ||||
인구 밀도 | 1,327.79명/km2 | ||||
경제 | |||||
• 일인당 | 67,737$ | ||||
HDI | 0.928 2020년 조사) | ||||
통화 | 잉청저우 제도 연방 프랑 (Y₣) | ||||
종교 | |||||
종교 분포 |
기독교 37.2% (카톨릭 19.8% 개신교 17.4% (장로회 7.8% 성공회 5.6% 루터회 4%) 일관도 16.3% 불교 15.2% 유교 10.9% 잉청저우 원주민 전통 신앙 3.9% 신토 3.2% 무속신앙 1.5% 무교/무신론 11.8% | ||||
기타 | |||||
ISO 3166-1 | YC, YCJ | ||||
도메인 | .YC, .瀛城州, .瀛城州諸島聯邦 | ||||
국제 전화 | +83 |
잉청저우 제도 연방(중국어: 瀛城州諸島聯邦/yíngchéngjhou zhudǎo liánbang 잉청저우주다오롄방, 민난어: 瀛城州諸島聯邦/êng-siânn-tsiu tsu-tó liân-pang 잉셴치우추토롄팡, 하카어: 瀛城州諸島聯邦/îng-sàng-chû chû-tó lièn-pâng 잉상추추토롄팡, 광둥어: 瀛城州諸島聯邦/Jing4Sing4Zau1 zyu1dou2 lyun4bong1 잉싱자우쥬두륜봉, 우어: 瀛城州諸島聯邦/Yinzentzoetsrtaulipaan 인젠처춰타우리퐌, 잉청저우어: Cilipunen Kemedlin Polungda Sepannah 칠리푸넨 크므딜린 폴룽다 세팡야, 일본어: 瀛城州諸島連邦/えいせいしゅうしょとうれんぽう 에이세이슈쇼토렌포, 오키나와어: 瀛城州諸島連邦/いいしいしゅうしょちょうれんぷ 이이시이슈쇼쵸렌푸,영어: Yingchengjhou Islands Federation 잉청저우 아일랜즈 페더레이션, 프랑스어: République fédérale des îles Yingchengjhou 레푸블리크 페데랄 드 릴레스 잉청저우, 루마니아어: Republică Federală din Insule Yingțăngjău 레푸블리커 페데랄러 딘 인슐레 잉청저우, 독일어: Bundesrepublik Inseln Yingchengjhou 분데스레푸블리크 인젤른 잉청저우, 필리핀어: Pederasyon ng Mga Isla Yingchengjhou 페데라시온 낭 막아 이슬라 잉쳉주우)은 동아시아 남동방의 잉청저우 제도에 위치한 국가이다. 1956년 독립투표로 이스트코스트가 독립한 직후, 단수이 협정으로 인해 잉청저우가 독립하면서 이 둘이 연방을 구성하기로 협의한 하에 생겨났다.
지리[edit | edit source]
전체[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국토인 잉청저우 제도는 8천 3백만년 전에 태평양 판이 수직압력에 의해 횡압력이 작용이 불가하여, 사키시마 제도 및 타이완 섬 내로 섭입을 못하게 된 것에 의해 판이 깨지면서 단층 활동이 일어나 바시 대륙붕과 함께 형성된 잉청저우 판[9]에 의해 생겼다.
이에 의해 태평양판은 잉청저우 판 밑으로 삽입하게 되었으며, 잉청저우 판은 양쯔판, 오키나와판과 단층을 이루면서 대만 서부의 대단층과 류큐 해구의 남서부와 화롄 단층이 하나로 이어진 영란중(瀛蘭重) 대단층[10]이 형성되기에 이르며, 이에 따라 현재의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판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때문에 작용하던 압력은 수천만년동안 수억번의 지진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끝내 잉청저우 판을 불안정하게 하여, 900만년 전, 옛 피란 섬 일대의 화산대지 형성을 시작으로 수백만년에 달하는 잉청저우 제도의 조성 활동이 이루어 지게 하였다. 이 때문에 잉청저우 섬 남부나 난링다오 등의 경우에는 아직도 활화산이 남아 있다.
잉청저우 직할시•신잉청현 지역[edit | edit source]
본래의 잉청저우 섬이었던 신잉청현의 향진 지역과 옛 피란 섬에 해당하는 잉청저우 직할시 지역(중, 둥, 난, 중, 베이, 시, 기타요시, 주오, 중정, 주산, 아키나카 10개구)을 제한 매립지와 간척지(잉청저우 직할시 완잉구, 신잉청현 장이 시, 신자이 시, 리샤오 시, 저우제 시)가 잉청저우 섬의 30%, 옛 피란 섬으로 하여금 만들어진 북잉청 평야가 약 30% 하여 잉청저우 섬은 약 60%가 평야(매립지/간척지+옛 피란 섬을 합친 잉청저우 대평원)로서, 현재의 신잉청현 내륙에만 산이 좀 있는 하나의 평야 위주의 섬으로 존재한다. 그 있다는 산은 남잉청산지가 있는데, 400만년 전에 판과 판이 충돌하여 화산활동으로 생성되었다. 그러나 심해였던 점으로 인해 2천 미터 가까이까지만 올라가고, 이마저도 침식 작용과 여러 차례의 화산 붕괴(240만년 전, 185만년 전, 117만년 전, 72만년 전, 44만년 전, 13만년 전, 6만년 전, 기원전 4000년, 기원후 39년, 782년, 1322년, 1983년)과 잇따른 수많은 화산의 화산활동 중지로 인해 주양산(珠陽山), 밍시산(明溪山), 구서우산(孤壽山) 등의 몇몇 활화산을 제외하고는 분화구가 붕괴하고 이에 침식 작용까지 더해져 일반적인 산같이 남아 현재의 1200m~1600m의 산지가 되었다. 북태평양과 남중국해의 경계에 있고, 위치 상 아열대기후인 점까지 작용하여 비가 많이 내리며,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자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심지어 동쪽 아키나카 구와 신잉청현 저우제 시 전체와 신잉청현 잉청저우 섬 남부 부분, 기타요시구 동부, 신잉청현 장이 시 남동부는 이들이 접해있는 바다가 잉청저우 섬 윗부분에서 바로 앞바다가 바로 난카이 트로프서 이어지는 유라시아판과 필리핀판의 경계로 인해 형성되는 해구이고, 잉청허와 남방 제도들을 통해 난 대단층(잉청저우 거대단층 또는 영란중(瀛蘭重) 대단층)이 형성되어 지진 다발 지역으로서 유명하다. 이는 잉청저우 지역의 내진설계 고강도화 의무-강제화에 영향을 주었다. 신잉청현 도서지역, 즉 바시 제도의 경우에는 전부 판 경계 근처에다 대단층에 위치한 탓에 잉청저우 제도에서 가장 생성이 늦었으며, 잉청저우 제도 서남부의 길게 늘여져 놓인 5개 섬들(바시제도(巴士諸島)와 난링다오(藍陵島)[11])의 경우에도 잉청저우 섬에서 시작되는 열점 선을 따라 300만년 전을 전후하여 격렬한 화산 분출을 통해 바다에서 솟아 나왔으며, 대부분 최고 해발고도가 1000m를 넘지 못한다. 그래도 난링다오에는 칼라울릿 산이라는 해발고도 1092m의 활화산이 존재한다.
한편, 잉청저우와 신잉청현의 유일한 강이자 잉청저우 섬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잉청허(瀛城河)는 약 190Km의 길이로 신잉청현을 굽이치다 잉청저우 시내와 그 근교 위성도시들 지역의 직선화된 수로로 흘러들어 둥구(東區)와 기타요시구(北吉區)의 육상 경계의 끝인 하구에서 동중국해(잉청북해)로 흐른다. 잉청허는 본래 짧았으나, 간척사업의 결과로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게 흐르게 되었고, 잉청저우 시내 구간과 그 근교 위성도시들 구간은 1915년, 1949년, 1986년 3차례에 걸쳐 치수사업에 의해 직선화된 결과로, 현재와 같이 흐르게 되었다. 그 결과로 잉청저우의 고질병인 물난리(홍수)가 사라졌으나, 잉청허의 길이가 20~30Km 가량 단축되었으며, 환경파괴가 수반되었다. 그 외 큰 강은 난링다오(남릉도)의 산 카를로 강과 펀완허(分灣河)가 있다.
그 외에도 잉청저우 국제공항을 위성도시의 개발 진행에 따라 논밭, 공공시설로 환원하기 위하여 이전하기 위해 잉청저우 섬 중서부이자 시역 남서부 연안에 만든 잉청저우국제공항인공섬은 그 특성에 맞게 해발 20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스트코스트 지역[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에서 세번째로 빠르게 형성된 곳이며, 580만년 전에 형성되었다. 해안에 넓게 펼쳐진 해안평야 형태의 화산대지와 지금은 화산활동을 중지한 상태에 있어 사화산으로 분류되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종상화산 형태의 휴화산인 스미스 힐이 결합해, 중앙부에는 완만한 구릉 지형이 펼쳐지다 해안으로 내려오면 5~20km 정도 펼쳐진 해안평야 지형이 펼쳐지다 바다에 이른다. 이들의 기반토는 전부 현무암 풍화토이다. 이스트코스트는 위도도 낮은데다 북태평양 한가운데에 위치해서 당연히도 열대우림기후이며, 스콜이 자주 세차게 내리는 특성 상, 상시 방재가 이루어 질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린다. 여기도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자리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강으로는 뉴온타리오 강과 레스트 강만이 존재할 뿐이며, 이들은 수량도 비교적 낮은데다, 섬의 특성상 현무암과 그 풍화토가 섬을 뒤덮고 있어, 제주도 마냥 복천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동도현 지역[edit | edit source]
옛날 열점의 한가운데에 존재하여, 판이 대략 지금의 경계로 굳은 740만년 전부터 분화하여 약 100만년 전에서야 분화를 멈추고 지금의 모습이 된 상태며, 그로 인해 심해에서 바로 솟아올라, 전체적으로 해밀턴 섬을 제외하고는 최고 높이가 1000m가 채 되지를 못하나, 해밀턴 섬만큼은 면적이 큰 영향으로 인하여, 평균 1500m의 최고 고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때문에 좁은 해안평지와 넓은 산간지대만으로 이뤄져있는 그저 안습한 지역이다(...) 기후는 당연히 열대 기후 그 자체이나, 산간지대에서도 1000m를 넘는 곳에서는 아열대 기후가 나타나기도 하며, 또 여기도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아니 그냥 잉청저우 제도 연방 전 국토가 그냥 다 태풍의 길목이다. 매년 태풍한테 걍 털린다 ㅅㅂ(...) 심지어 동도현 일대가 위치가 위치인지라 미야코지마보다 동쪽이라 그런지(...) 동도현만 유일하게 UTC+9 시간대를 채용한다(...) 강은 파날리칸 섬에 있는 와탄나가와 강, 해밀턴 섬의 카마키가와 강, 스화가와 강, 이스트랜드 강이 있다.
해청위 연방특별구[edit | edit source]
1980년대 후반 수도 이전을 통해 조성된 인공섬이며, 그 전에는 가라앉은 산호초 군락과 해저 산으로 구성된 해저 지형에 불과했다. 해청위 연방특별구를 구성하는 해청위 섬은 대체로 평탕한 지형이며, 지금의 모습으로 봐도 인공섬 조성 이전의 지형에 대한 흔적은 남아있는데, 일부 경관 보존 겸 식수, 농업용수 등을 해결하기 위해, 가라앉은 산호초 부분의 전후로만 간척을 하여, 섬의 중간에 대체적으로 깊었던 해저지형만으로 이뤄졌던 부분에 인공적으로 담수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구학적 분포[edit | edit source]
민족[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 민족 비율 한족 내성인 (38.8%) 한족 외성인 (18%) 미국계[12] (13.9%) 한국계 (9.4%) 잉청저우 원주민 (7.7%) 일본계 (4.5%) 류큐계 (4.3%) 필리핀계 (3.8%)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우에는 대만의 남동쪽, 류큐 제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선사시대에서 고대까지 대만 원주민과의 근연혈통이 넘어와 선주민으로 정착했고, 16세기 한족의 대만 대이주 시절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국토 중에서도 잉청저우 섬에 한족이 많이 넘어온 상태에서 한족 내성인과 잉청저우 원주민의 인구 비율이 형성되었다. 그나마 세판 왕국으로 대표되는 통일된 정치체와 통일된 민족 정체성을 지닌 채로 한족의 도래를 맞이한 통에, 원주민 인구의 몰살과 통혼은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고, 혼혈은 적은 비율로만 생겨나고 근대 이전까지 잉청저우 원주민의 인구는 도래 이전의 20만명을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단에 잉청저우 시가 존재하는 잉청저우 섬은 1890년대 초부터 1차대전 까지 독일 식민지였다, 전간기에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써 독립 준비를 거쳐, 2차대전에는 일제에 점령당했다가 2차대전 종전 이후에 중화민국으로 넘어가게 되어 국공내전의 여파를 뒤집어 쓰면서 외성인도 많이 넘어왔다가 독립하고 다른 지역과 연합하며 연방의 일원이 되고, 나머지는 미국 식민지였다가 독립해 연방의 일원이 되는 등의 근현대사가 쓰인 상황으로써, 식민지 시절 미국인 외에도 미국령이던 필리핀에서 이민한 사람, 한국인이나 류큐인 등도 많이 정착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복잡한 역사와 근현대사가 결합해 잉청저우 섬에서는 한족이 3/4를 차지하는 절대다수 상태에서 잉청저우 원주민, 일본인, 일부 한국계, 일부 류큐계가 1/4를 차지하고 , 그 외 지역에서는 미국계 4:한국계 3:류큐계 2:필리핀계 1로 분포하게 되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다양한 민족 분포를 형성했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다수 연방민의 염원으로 건국된 국가인 만큼, 국가 정체성은 하나로 결집해 있다.
종교[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 종교 비율 카톨릭 (19.8%) 개신교 (17.4%) 일관도 (16.3%) 불교 (15.2%) 무교/무신론 (11.8%) 유교 (10.9%) 잉청저우 원주민 전통 신앙 (3.9%) 신토 (3.2%) 무속신앙 (1.5%)
위에서 언급한 민족 분포에 의해서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종교 분포도 다양해졌는데, 제일 먼저 도교에서 갈라진 일관도와 불교의 비중이 15%를 넘고, 기독교 중에서도 개신교와 카톨릭, 앞서 언급한 일관도와 불교를 제외하고 10%를 넘는 종교가 유교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계의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과 일부 한족 내성인, 한족 외성인의 다수, 류큐계의 다수를 중심으로 카톨릭은 20%에 근접하고, 개신교도 17%를 넘는 정도의 막강한 교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기독교 종교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며, 기독교의 교세는 정체 상태에, 비-기독교 종교의 교세는 신토나 무속신앙을 빼고는 근소한 폭의 상승세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무신론이나 무교의 비중은 합산 시 11.8%밖에 되지 않아서, 겉으로는 말 그대로 종교에 헌신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고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국민들은 의외로 신앙심이 약하다. 그 결과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연방민 사이에서는 이성과 논리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으며, 종교에 대한 광신도는 사회적으로 도태되는 구조가 만들어져 오랜 전통으로 굳어졌다. 이러한 경우가 맞물려 그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종교를 택하는 사람들만이 많다. 이러한 신앙심 문제는 각 종교의 성직자 대표들이 대표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성토하는 단골 문제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신토나 무속신앙, 잉청저우 원주민 전통 신앙같이 민족적인 대표성이 있는 소수 비-기독교 종교의 경우에는 후자를 제외하고는 그 세가 감소하고 있기는 하나, 민족적인 대표성 하나로, 일정 민족에서 일정한 비율을 고정적으로 보장받는 위치에 서 있다.
정치[edit | edit source]
권력구조[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방입법원 |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방입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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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청저우 제도 연방 국민대회 | 잉청저우 제도 연방 국민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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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연방제 오권분립 민주공화국으로서, 중화민국의 요소(오권분립)와 독일식 연방제를 절충하여 정치체제를 만들었으며, 대만, 한국, 일본, 필리핀, 심지어는 독일의 헌법을 절충하여 헌법을 만들어낼 정도로 정치적 영향을 골고루 받아 혼합이 상당히 되어있다. 중앙 오권과 지방(연방구성체) 오권이 모두 존재하나, 독일식 연방제 특성 상, 지방(연방구성체) 오권의 힘이 중앙 오권보다는 약하다. 그래도 연방제인 만큼, 각 연방구성체(직할시/현)는 독자적 헌법과 법률을 만들 수 있으며, 지방(연방구성체) 오권 위에는 중앙(연방정부) 오권이, 중앙(연방정부) 오권 위에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 국민대회가 놓여 있어, 정권과 치권이 분리되고, 치권을 오권에서 권력을 분립하여 담당한다. 다만, 최근에는 양원제로 운영되는 연방구성체 의회의 상원 강화 겸, 지방 오권 위의 중앙 오권 구조로 인한, 중앙 오권의 불가피한 연방구성체 내 정권 행사로 인한 월권 논란의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상원을 연방구성체 의회에서 분리시켜, 단원제 연방구성체 의회로의 개편 및 연방구성체 의회의 상원을 개편한 (가칭)'연방구성체 주민대회'를 만들거나, 상원에서 지방(연방구성체)의 정권을 담당토록 하려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참정권의 경우에는 16세가 되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정국을 주도하는 6당과 해적당으로 이뤄진 7개의 연방 단위의 정당(연방정당)에서는 예비당원제를 활성화하였다.
중앙정치[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는 국민당, 자유당, 민주당, 진보당, 농민당, 녹색당 이 6개의 정당이 주요 정당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이들 원내 6당 체제 하에서 정책연대/연정 등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들은 자유당, 민주당, 농민당, 녹색당을 제외하고는, 당의 역사 자체가 대만의 정당의 잉청저우 섬 일대의 지역조직 혹은 잉청저우 일대으 당외들의 연합이나 미국의 정당의 이스트코스트 일대의 지역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중국국민당의 잉청저우 섬 일대의 지역당들 및 이스트코스트 내의 미국 공화당의 지역당들을 재편하여 만들어졌으나, 국민당의 조직 과정에서 잉청저우 섬의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신자유주의/자유방임주의)자들과 이스트코스트의 자유주의자들이 대탈주를 벌이며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진보당의 경우에는 당시 잉청저우 섬에서 잉청저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잉청저우 섬의 당외들 중에서도 중도개혁 성향 및 사회자유주의 성향의 사람들과 미국 민주당의 이스트코스트의 지역당들이 연합하여 만들어졌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은 잉청저우 당외 중 진보 성향을 띄던 사람들은 당시 이스트코스트의 진보 성향을 띄던 자체적 지역정당인 이스트코스트 사회민주대중당과 연합하여 진보당을 창당하였다.
농민당과 녹색당의 경우는 정국을 주도하는 6개 당 치고는 창당배경이 특이한데, 이는 농민당과 녹색당이 다른 4개 정당과 달리 연방이 수립된 지 40년 정도 지나서야 창당된 연방정당이라서 그렇다. 일단 농민당은 1995년 잉청저우 제도 연방과 미국 간의 FTA에 대한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이끌면서 창당되었다. 1970년대 시작되었다가 1980년대 초중반에 약해진 줄 알았지만 1980년대 후반의 집권정당 교체로 강해진, 한국의 시장개방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던 시장개방 및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하여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농민들은 엄청난 적자에 허덕이는 손해를 수년 째 보고 있었음에도, 유리한 품목이 2차/3차 산업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였음에도, 당시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중앙정부에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밀어붙이고, 이에 각 지방정부들은 독자적 대책을 세우고 있었으나, 한계가 있었음이 알려지자, 농민들은 트랙터를 몰고 잉청저우 직할시의 도심인 중정구의 중정광장으로 모두 집결하고서는 248일동안 시위를 함을 통해서 역사적인 농민운동(벼이삭 운동)을 진행, 이후 벼이삭 운동을 계기로 농민대의정당 창당운동을 통해 농민당을 창당하여 농민이 농민 스스로를 대표하는 정당을 만들었다.
녹색당의 경우, 1990년대 온갖 환경파괴 참사(1993년 슐수이광 연안 비닐봉지 유류사건, 1991년 잉청허 카드뮴 오염사건, 1995년 잉청허 석분(石粉)오염사건, 1994년 잉청저우 스모그 사태, 1990년 신잉청현 대규모 산사태, 1992년 장이구-주산구 집단 납중독 사건 등)들이 터져나올 때에 일부 생태주의자들이 시민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코자, 환경운동가들과 생태주의자들의 주도로 농민당과 비슷한 시기인 1995년 창당되었다.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는 1956년부터 경제성장-안보외교-내부의제-지역의제-그 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대만의 범람/범록의 투쟁과 미국의 양당제 투쟁을 양 진영의 투쟁으로 바꾸어 적절히 섞어놓은 듯 한 정치 패턴인 국민자유 선거정책연합/진보민주 선거정책연합의 양대 연합 정치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지금의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진 것은 1990년대 농민당과 녹색당이 창당하고 원내 안착에 성공했을 때이다. 그러나 후술된 대로, 2018년 선거 이후로 그것이 깨져 국민당, 자유중도연대(자유당-민주당), 진보환경연대(진보당-농민당-녹색당)의 3파전으로 흐르게 된다.
한편, 선거에서는 1998년, 2008년에는 국민자유, 2003년, 2013년에는 진보민주가 승리하는 등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었으나, 2018년에는 사상 최초로 민주당과 자유당이 손잡고 자유중도연대를 이끌어내고, 국민당이 독자출마를, 진보당-농민당-녹색당이 진보환경연대를 이끌어내어 자유중도연대가 압승하는 등의 전례 없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외에도,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는 수 개의 지역 정당과 원외 연방정당으로서 해적당이 존재한다.
중앙 오권의 위에 있는 국민대회의 경우 의석은 110석이며, 58석은 인구비례로, 29석은 인구비례 분배 의석의 절반 가량으로 각 시/현/특별구에 할당하는 각 시/현/특별구 의회에서 선출하는 의석, 23석은 재외국민 간 선출 5석, 직능대표선거 16석, 양성평등단체 선출 2석으로서 구성되는 다양성 보장 의석이다. 과반기준의석은 56석이다.
연방입법원 의석은 단원제 하의 320석이며, 160석은 각 구(잉청저우 15개구+이스트코스트 6개 구는 인구에 따라 1개 구당 2~3선거구(잉청저우 36선거구, 이스트코스트 14선거구, 기준선 340,046명), 신잉청현, 동도현은 시의 경우에는 기준선 이상이면 독립선거구로 두되, 그 외의 기준선 이하 인구의 시향진 몇개를 1선거구화)에서 지역구로 선출한다. 물론 중선거구제를 채택해서 1선거구당 2명의 의원을 선출하기에, 지역구는 80개이다. 나머지 160석은 비례대표로 선출한다. 과반기준의석은 161석이다.
지방정치[edit | edit source]
지방자치의 경우에는 독일식 연방제와 오권분립의 혼합, 끊어지지 않은 민주 정치로 인해 일찍이 선진적인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연방구성체의 헌법은 국민대회 대신에 지방의회의 상원에서 제정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행정구역 경계조정/분할/통폐합 등은 주민투표를 통해 확정한다. 다만, 행정구역 경계조정 및 분할/통폐합 등의 중대사를 주민투표를 통해 확정하는 것을 제외하면, 시구향진 정부는 비록 직할시/현 정부 및 연방정부와 달리 국가 구성권력(고유 국가권력)을 갖추지 못해서 제한되기는 하지만, 공직자를 독자적으로 선발하고 고용/해임할 수 있는 권한인 인사권, 행정조직을 독자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인 조직권, 예산을 독자적으로 책적하고 집행할 수 있는 재정권, 조세를 징수할 권한인 조세권을, 시구향진 의회에서는 독자적 법률제정권은 없지만, 조례를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인 입법권을 확보하는 등의 연방헌법 및 연방법률에 제시된 부분 및 직할시/현 정부에서 직할시/현 법률에 명시된 부분으로서 시구향진 정부에 위임하는 권한만을 행사하고 있으며, 연방정부와 직할시/현 정부는 시구향진 정부의 행정행위에 대하여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연방특별구 제도를 폐지하고, 해청위 연방특별구를 해청위 주로 바꾼 다음에, 수도 해청위 시를 직할시로 승격하고, 직할시의 명칭을 자치도시주(自治都市州)로 변경 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경제[edit | edit source]
연방 수립 배경도 각 지역별로 다를대로 다른 문화와 지역색, 다양한 민족으로 인해 잉청저우 제도를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로 만들려면 연방 수립만이 답이었던 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그 후 수십년 간 전 분야에서 잉청저우 제도의 국민 의식을 기반으로 전 분야에 지역적 분권 의식이 강했고, 이로 인해 경제도 연방시/현별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주요 대기업이 자리했는데, 잉청저우 시를 기반으로 한 중화학공업/건설업 중심의 콰이하이집단, 철도 중심의 잉청저우 철도, 소비자 서비스업 중심의 메이세이 그룹, 경공업/악기/서브컬쳐 컨텐츠 중심의 벽성그룹, 금융 중심의 광톈금융기업집단, 이스트코스트 시를 기반으로 한 연예산업 중심의 월드와이드 엔터, 철도 중심의 이스트코스트 노던 철도, 화장품 중심의 정창화장품,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토종 패스트푸드 회사인 애치팔래고 버거, 전자산업 중심의 종릉전자그룹, 신잉청현 기반의 농림어업 회사인 정림영농사, 종묘 회사인 칭양종묘, 동도현 기반의 민영광업회사인 앤드류 광업, 어업조합인 동도현 근원해양 민주어업조합, 임산물 조합인 해밀턴 섬 버섯 및 목재 생산자 민주협동조합 등의 회사들이 그 예시이다.
잉청저우 직할시 지역[edit | edit source]
동북아의 남서방에 횡꽁[14]이 있다면, 동북아의 남동방에는 잉셴치우[15]가 있다.
잉청저우 직할시 자체는 중세 이전까지는 별 볼일 없는 화산대지 지형의 섬이었으나, 중세 이후 한족, 류큐인, 한민족 등의 이주를 통해, 전형적인 국제도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역업 중심, 상업 중심, 개방적인 특성 등이 갖추어졌고, 이를 이용해 근대 이후로는 잉청저우 직할시가 중화권, 일본,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간의 민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로 인해 홍콩을 보조하는 성격에서 잉청저우 시 일대의 근대시대가 출발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상황 속에서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는 중화권,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사이의 돈을 잇는 금융 허브이자, 남아도는 전기 등을 이용해 추진한 공업화가 성공함을 통해 동아시아의 여러 공업의 중심 기지 중 하나가 되어, 무역업 의존을 벗어나 금융업, 제조업, 2000만명대 중반까지 성장한 작은 내수시장을 이용한 여러가지 산업[16]까지 성장하여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는 산업 다각화의 성공 속에 수많은 돈을 벌고 있는 구조를 형성케 하고 있으며, 이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제가 경제위기를 회피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거치는 초장기 호황을 창출토록 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동아시아에서 1인당 GRDP 5만불, 6만불, 7만불을 제일 먼저 달성한 곳으로 유명해지고 있다. (울산보다도 빠르거나 비슷하다,)
외국인을 상대하거나 회담, 세미나, 컨퍼런스, 전람회, 박람회 등을 관광과 연계시키는 MICE 산업, 첨단 하이테크 제조업과 오폐수 및 공해 정화장치가 잘 되어있는 친환경적인 중화학 공업 및 친환경적으로 발전한 경공업 등이 주력 산업이며, 최근에는 수백년의 노하우와 판 경게 코앞이라 지진과 맞서 싸워온 결과물인 탄탄하면서도 지진과 현피를 뜨면 그 어떤 유형이든, 그 어떤 지진 규모든, 그 어떤 진도든 상관없이 승리하는 잘 버티는 내진설계를 기초삼아, 주력 산업인 토목사업(건설업)이 기술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다만, 4차 산업혁명의 상황을 예의주시하여, 인공지능-드론 등의 첨단산업도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다. 농림어업은 근대시대부터 시작된 도시화의 여파로 인해 대부분 신잉청현으로 이동했으며, 슐수이광 어업항(시구(西區)), 평순동 주택가 옥상 텃밭 클러스터(주산구(州山區)), 요츠자와 반농반어촌(아키나카구(秋中區))[17] 등만 등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잉청저우와 신잉청현 지역의 상업 특수[edit | edit source]
한편, 잉청저우 직할시와 신잉청현은 대만에서 독립해 나온 것과 일본계의 존재 때문인 지, 2.28 항쟁 추모제 및 위령제를 대규모 행사로 열고 있고, 심지어 시치고산이 다가오면 참배객들이 신사에 몰려든다. 이런 점 때문에 2.28 항쟁 추모제에 쓰일 용품, 2.28 항쟁 희생자 제사 용품 및 2.28 항쟁 희생자 묘지의 참배 공물 등이 대규모로 팔리는 특수가 존재한다. [18]
이스트코스트 직할시 지역[edit | edit source]
이스트코스트는 미국인이 주요 민족의 지위에서 한국계와 결합해서 독립을 유지해서 그런지 미국이나 한국의 대중문화를 수입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대중문화와 관련된 산업이 특화되어 있다. 유명 음반사들의 지사가 이스트코스트의 센트럴 구 북단에 모여있는 것을 보고 그 밀집한 거리를 음반거리라고 부를 정도니 말 다한 셈. 심지어 패스트푸드 산업도 발달했다 보니, 잉청저우보단 문화산업과 패스트푸드 판매업이 발달했으며, 이런 연유로 수많은 대중문화 예술가들과 패스트푸드 애호가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이스트코스트 경제의 주 수입원으로 작용하여 잉청저우보단 낮은 1인당 GRDP(5만 3천불)를 기록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잉청저우는 생산-소비 복합도시인 데 반해서, 이스트코스트는 순도 100% 소비도시인 셈이다.
신잉청현[edit | edit source]
애초에 자연환경만 봐도 농림어업이 최선이다. 그러나 잉청저우 근교는 죄다 베드타운이다. 8개 현할시가 30만~40만 사이, 신자이 시/장이 시/저우제 시/리샤오 시에서는 80만~100만 사이에서 베드타운을 이루고 있으며, 그 외는 죄다 향진으로 지정될 정도로, 북부 12 현할시를 제외하고는 인구가 대부분 농림어업에 종사하고, 인구가 희박하다. 예외가 있다면 남방도서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한 펀완 시 정도이나, 이 경우에도 식품가공업이 주 산업일 정도니 말 다했다. 잉청저우의 혐오시설이 죄다 신잉청현에 자리한 탓에, 잉청저우와의 미묘한 소지역주의가 존재할 정도로, 농림어업과 인구희박지의 대명사이다. 여기서 알수 있는 부분은 잉청저우의 혐오시설들에 근무하는 사람들, 잉청저우 근교 8개 현할시 시민을 제외하고는 죄다 농림어업에 종사한다. 어업은 대부분 필리핀계가 바탄제도의 풍습이 퍼져 이루어진 전통 농업으로만 잡아서 생산량이 떨어짐에다가 양식이 2000년대 중반에 겨우 도입되었고(...), 농업은 농기계로 상당부분 대체되었지만 아직도 소규모 자영농의 비중이 어느 정도 높은(전체 농업에서 37%) 상태에서, 전통 방식과의 공존을 꿈꾼다. 생산량은 그로 인해서 더 높일 수 있는 여력임에도 정체중이다. 임업은 산지에서 이루어지는데, 1500m를 넘지 않는 환경으로 인해서 열대목 조림 농장만 있을 정도(...)다. 게다가, 기후로 봐도 신잉청현은 전부 열대기후로 들어가는 모양새라서, 인삼, 산양산삼이나 온냉대기후의 버섯종 등은 시설을 빼고는 재배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북부 12 현할시 지역에서도 식량 수급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농업이나 임업 중 버섯 재배업을 배려하여 고층 농장을 세워, 거기서 재배하도록 하였다. 이는 인구 급증이 예상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부터 장려되어 40년 가까이 되는 동안 성공적으로 정착한 성공적 도시 농업의 사례로서 기록되고 있으며, 이 고층 농장은 의외의 수익원이 되고 있다. 그래서 결론은 신잉청현의 부의 87%는 잉청저우로 출퇴근하는 통근객이나 북부 12 현할시 내부의 많은 고층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쥐고 있는, 말 그대로 도농 격차 자체가 아예 기울어진 운동장 그 자체인 대환장파티 빈익빈 부익부 그 자체라는 것이다(...)
동도현[edit | edit source]
이스트코스트에서 바다를 맞댄 두 개의 위성도시(서부 2현할시, 西部二縣轄市, 20만명대)와 해밀턴섬 4개 시(4중거점, 四重據點, 10~20만)을 제외하고는 2차 산업과 3차 산업 중에서 내수계 서비스업(사업자 서비스업과 소비자 서비스업 중 관광객을 주로 대하는 업종들을 제외한 서비스업을 합쳐 이르는 잉청저우만의 사회용어)이 빈약하며, 농림어업, 광업, 관광산업으로만 먹고 산다. 하지만 농림어업의 실태는 미국계 농민과 한국계 농민의 존재로 인해 기계농업과 대규모 경작 농업이 흔해서 현 전체 농지의 83%(!!!)나 되는 점을 제외하고는 신잉청현과 똑같은 상태(...)인 것이 흠일 정도로 GRDP를 크게 깎아먹는다. 필리핀계 농림어민과 류큐계 농림어민은 그 수준으로 영세하고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광업은 주로 몬테 섬과 해밀턴 섬에서 무연탄, 역청탄, 석유, 흑연, 구리, 망간, 철 등을 최소 채산성이 되는 수준으로 묻혀 있는 것을 캐서 잉청저우로 광석이나 원유 등의 원자재를 파는 수준이긴 하지만, 잉청저우의 산업이 독자적으로 태동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는 정도가 된다.
해청위 연방특별구[edit | edit source]
오권분립으로 이루어진 연방정부의 소속 공무원과 공영방송 재단 본부 및 그 가맹 방송국인 해청위 수도 방송의 종사자, 그들의 가족들, 도시화로 갈 데가 없어져 해청위로 온 일본계 및 한족 내성인계 농민을 중심으로 약 140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관계로, 북부의 농업과 남부의 사용자 서비스업 및 연방정부 산하 국가기관/공공기관 및 그 관련 산업이 발전해있다. 이를 다른 말로 옮기면,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 모든 연방정부 출자 공기업의 본부는 해청위 연방특별구에 있다는 말이며, 말 그대로 경제적 주도권이 아닌, 인위적으로 부여된 정치적 주도권을 가진 셈. 애초에 해청위 연방특별구를 조성한 목적 자체가 잉청저우의 과밀화를 덜어내고자 인위적으로 수도, 즉 정치적 주도권을 이전하고,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식량 수급 문제를 완화하고, 이 당시 도시화로 갈 곳을 잃은 일본계 및 한족 내성인계 농민을 챙기고자 한 것이었던 만큼, 이는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전력 수급[edit | edit source]
세계 최초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율 과반 달성 국가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지리적, 지질학적 특성 상 연방 국토 지하에 내재된 막대한 지열 에너지를 기반으로 미국 속령 혹은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절인 1930년대부터 시범 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지열 발전, 태풍을 비롯해서 1년 내내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한 풍력 발전, 1950년대 말 ~ 1960년대 중반 수중보 형식의 유류식 수력발전 기술의 개발을 통해서 활성화된 수력 발전 등을 이용하여 1950년대 연방 성립 때부터 연방의 전력 수요가 급증한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까지 신재생에너지가 80%~90%의 발전량을 달성했다. 현재는 연방의 전력 수요 급증으로 인해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이 50%~60% 사이로 줄었고, 1980년대 말 가동을 시작한 잉펑 원전, 마타나오 원전, 웨틀랜드 원전을 비롯한 5개 원전 36기(器)를 통한 원자력 발전이 27%~45%, 화력 발전 등의 기타가 5%~13%를 차지하는 상황이다. 다만, 화력 발전의 경우에는 현재 수중보 형식의 조력발전으로의 대체 계획이 세워진 상황이라 2025년 즈음에는 신재생에너지 70%, 원자력 30%로 조정 예정이며, 이후 2050년까지 원자력에서 핵융합으로의 이행을 통해 신재생에너지 50%~70%, 핵융합 30% ~ 50%로 재차 조정 예정이다.
문화[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각각 출발이 달랐던 잉청저우 제도의 여러 섬이 2개의 정치체로 뭉치고, 독립과 생존을 논의하던 과정에서 하나의 연방으로 뭉친 만큼, 전통문화와 대중문화 및 서브컬쳐계 현황이 각 연방주체, 혹은 문화적인 지역마다 다르다.
유라시아비전 송 콘테스트에서는 파이널(본선)에 항상 진출해 아시아권 국가 합산 상위 10등을 놓친 적이 6번밖에 없으며, 유라시아 전체 합산에서 1등을 차지한 적이 2번 있을 정도[19]로, 늘 상위권에서 좋은 노래를 들고 참전하는데, 이는 이스트코스트 지역의 연예산업으로 인해 양질의 아이돌이나 아티스트를 양성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서이다.
공영방송으로는 ARY와 그 산하 가맹 지역 공영방송이 존재하며, 중화민국과 방송방식이 같고, 류큐 제도와 대만이 근접해 있어서 전파 월경이 일어나다보니, 일본민국 및 중화민국, 대한민국, 류큐 공화국, 프랑스, 독일과 협정을 맺어, 중화민국(중앙 및 지역) 및 대한민국, 일본민국, 류큐 공화국, 프랑스, 독일의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을 멀티플랙스의 형태로 송출게 하여, 이를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 시청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자체적인 민영 지상파 방송 등장에 한계가 생겨났다. 그럼에도, 동아시아에서 DVB-T2 방식을 사용하는 국가에서의 증대하는 수요와 '잉청저우만의 민영방송'의 필요성을 노리고, 1998년에 UHF 중에서도 방송용 고주역대(대략 52~69번)를 이용해 민영방송 '잉청저우 상업전시대'가 등장, 이는 현재 UHF 50~51번을 차지하는 멀티플랙스로 송출 중이다.
잉청저우 직할시와 그 근교 지역[edit | edit source]
전통문화와 대중문화[edit | edit source]
류큐문화, 일본문화 그리고 타이완-푸젠-광둥으로 대표되는 중국 남방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역사로 인해 전통문화에서는 그 셋의 전통문화가 혼재되어 나타나거나 퓨전된 문화가 나타난다. 다다미방(육첩방)에 대만식 도교 제단이나 대만식 불단이 놓여있다던가, 우육면에 중국당면 대신에 라멘 생면이나 소바 면을 넣어먹는 문화처럼 말이다. 그 때문인 지, 대중문화에서는 이런 역사 속에서 J-POP과 대만 대중음악, 일본과 대만의 대중문화 등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며, 서브컬쳐가 강세를 나타낸다. 특히, 중국계가 70%를 넘는 잉청저우 특성 상, 중화권 음악시장에서 대만 다음으로 큰 시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0.2%를 차지하는 한국계와 그 외 소수의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한류가 영향을 끼친다. 써닉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장후이메이(阿妹)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장국영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BTS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모무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AKB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트와이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대체역사 설정가도 있고 심영물 즐기는 얘들도 있고 덕후분들도 있고 그냥 다 섞여있다. ㄹㅇ ㄷㄷ
언론[edit | edit source]
중화권과 일본의 신문의 진출이 1880년대부터 지금까지 빈번하게 존재하고 있다. 특히 방송의 경우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절(잉청저우 섬) 및 2차대전 이전 미국령(이스트코스트-신잉청현 도서지역) 시절 개국하였고, 연방 성립과 함께 ARY로 정리된 공영방송 라디오와 연방정부에서 1957년 개국하고, 공영방송 정리 과정에서 ARY로 흡수된 공영 텔레비전 방송이 있음에도, 1960년대부터 중구난방 우후죽순으로 중화민국의 방송국들, 홍콩의 민간 방송국들, 일본 오키나와 지역 민간 방송국들이 편의를 위해 세워버린 중계소를 2014년에 합동송신소를 세워 송신소와 중계소들을 통폐합해 그 방송국들의 국외 지상파 송신소 형식으로 송신하고 있으며, 합동송신소에서 공영 텔레비전 방송도 송신 중이다.[20] 하지만, 케이블 SO의 경우에는 2009년에서야 겨우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케이블이 대만에 비해 늦게 활성화 된 것이다. [21]
그리고 잉청저우의 독자적 신문인 에이세이슈민포, 에이세이신문, 잉청저우일보, 잉청저우시보는 빈과일보가 잉청저우에 상륙한 2012년 이후로 죄다 빈과일보식 과다 멋꾸미기(...)에 물들어버렸다. 결국 신문도 타이완화 되어버렸다. 모든 일의 원흉은 빈과일보다. 그런데 그 빈과일보도 정작 홍콩에서 넘어온거다.
다문화에 기초한 도시문화[edit | edit source]
본래 잉청저우 섬에는 다수의 중국인, 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그리고 잉청저우 원주민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다문화사회였으나, 2차대전 종전 이후에 반환 겸 접수한 중화민국의 국민정부는 중화문화를 제한 나머지를 탄압하고 강제동화를 시도했으나, 잉청저우 섬의 시민들의 강력한 반발과, 그로 인해 고취된 독립 여론으로 인해 단수이 협정이 체결되어 이루어진 독립으로 무위로 돌아갔다. 1990년대 잉청저우 원주민 문화의 재부흥이 일어나고, 국제도시화에 힘입어 일본인과 한국인의 문화를 재부흥 시키었고, 일본인 중 류큐인들은 국민정부시기 숨겨져 보존하던 류큐문화도 부흥하게 되었고, 다문화에 기초하여 도시 문화를 일구었는데, 수많은 전통문화와 대중문화가 약 2만 1천 제곱킬로미터 남짓한 도서국가의 2천 제곱킬로미터 가량의 최대도시에 펼쳐지고 있다. 이를 이용하여 잉청저우 다문화축제를 10월 중순 즈음에 연다. 이 축제는 가끔씩 대한민국의 이태원 지구촌 축제와 연계되기도 한다.
언어생활[edit | edit source]
학구도 공화국, 후순, 후신 등이 표준중국어 병음 표기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잔해(...)인 한어병음을 표준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에 반해, 잉청저우 제도 연방, 그 중에서도 잉청저우 직할시와 신잉청현에서는 표준중국어를 표기할 때 중화민국과 함께 통용병음을 표준으로 채택하여 사용한다. 아무래도 상술한대로 중화민국의 통치를 10년 정도 받다가 별개의 정체성을 부각하여 독립한 국가에다, 중화민국과 일본민국과 대한민국, 류큐 공화국의 영향을 동시에 받기 좋은 위치에 서있어서 그런 듯 하다. 잉청저우어의 경우에는 로마자로 적으며, 각 지역의 방언이 아닌 하나의 표준어가 하나의 언어를 이루는 특이한 언어로써, 잉청저우 섬의 원주민들이 사용한다. 그 외 언어는 해당 언어가 쓰이는 모국의 표준어를 표준으로 삼아, 해당 언어가 사용하는 표기법을 사용한다.
이스트코스트 지역[edit | edit source]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무인도였던 이 섬을 미국인들이 식민지로서 개척하고, 한국인이 미국인들에 고용되어 그 다음에 들어온 탓에다가, 상기한 것의 결과인 서양열강의 내습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서양풍 문화가 남았다. 대개 주거문화가 많이 남아있어서, 유럽풍의 주택이나 미국풍의 목조/석조 주택이 이스트코스트의 센트럴 구와 하버 구에 걸친 구시가지에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현재는 한국과 미국의 대중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한류가 기승을 부리며, 10대~20대 여성 중엔 사생팬이 좀 있다(...) 그런데 이거 빼고 할 말이 없다. 정말로 빈약한 문-화 ㅠㅠ... 여기는 주요 아이돌 사생팬, 양덕들 아니면 청년이나 청소년은 살 수가 읎다! 취소선에 나온 내용이 사실인 지 잉청저우 사람들은 양덕에 대해서는 터치를 안하나, 아이돌 사생팬 계층에 한해 타 부류에 대한 존중도 없고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하여 조롱거리로 삼다가 빈번하게 폭행사건이나 언어폭력 사건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며[22], 학창시절의 경우도 양덕 등으로 대표되는 서브컬쳐를 향유하는 경우는 어느정도 세력이 있어서 존재가 가능하지만, 각 아이돌 사생팬 간에 상호 배척성이 높은 편이다. 심지어 주요 아이돌 사생팬들이 청소년/청년 계층을 쥐고 누르고 있다. 그렇다고 친구 될 사람은 친구 다 되지만. (...) 아무튼, 한국과 미국에서 따올 건 다 따왔다 보면 된다.
신잉청현[edit | edit source]
신잉청현에서 잉청저우 직할시의 근교에 있는 12 현할시를 제외하고, 잉청저우섬 남단과 도서지역을 나눠서 보면, 잉청저우 섬 남단은 잉청저우 섬의 본래 지역이었으며, 잉청저우 원주민들의 본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만에서 건너온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정착해 원주민들이 기원한 곳이기도 하다. 그 때문으로 원주민들의 전통양식이 국민당 정권의 탄압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을 정도로 산골 아니면 시골 그 자체여서, 전통문화는 원주민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다. 잉청저우 직할시의 잉청저우 원주민과는 도시문화를 잘 받아들인 점을 제외하면 다르지는 않다. 잉청저우어는 잉청저우에 있던 왕조의 멸망 이후의 기록과, 구어로만 이어지다가, 일제의 침략전쟁에 의한 일제 점령기 및 중화민국 귀속을 거치며 탄압받다가 독립기를 거치면서 문자표기가 로마자로 통일되었다.
잉청저우 섬 남단에는 한족 이주민도 상당히 있지만, 그들은 잉청저우 직할시의 한족들과 똑같은 양상을 보인다. 도서지역을 보면,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배 하고 이 도서지역을 개척할 적에 필리핀인을 보내 개척시켰으므로, 필리핀의 문화가 강하게 배어있다. 그래서 그런 지,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 선진적인 생활수준에 걸맞지 않게 지프니 등이 보이기도 한다. 원래 생활수준이라면 그런 운송수단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되겠지만, 독립 이전엔 이스트코스트 속령 쪽에 속했던 도서지역으로서 전통문화로서 보존의 대상이 되었기에, 대체되지 않고 그대로 운행중이라고 한다. 물론 시대에 맞게 대기오염을 저감할 수 있도록 수없이 개조되고 있다.
동도현[edit | edit source]
동도현에 처음 정착한 것은 류큐인들로써, 동도현에 정착했었던 류큐인들의 문화가 곧 이들의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류큐인들이 표류하면서 살았던 마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23] 그럼에도, 류큐인들이 떠난 이래로 황무지가 된 동도현에서는 미국인과 한국인이 들어와 미국의 전통 문화와 한국인의 전통문화가 이식, 그 후 류큐인들도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류큐의 전통 문화마저도 이식되었으며, 그러면서 동도현에서 이들 세 문화의 융합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동도현의 문화 특성을 보면, 전통문화에는 류큐의 문화, 미국의 문화, 한국의 문화 등이 이식된 모양새이며, 그 때문인 지, 동도현의 전통 가옥은 대개 류큐식 가옥이나 미국식 석조-목조 가옥, 혹은 한옥이 대다수이다.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이스트코스트와 양상이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밀턴 섬의 스화, 카마키, 이스트아일랜즈 등의 주요 도시와 그 근교의 도시, 이스트코스트 동쪽의 2개 위성도시를 제외하고는 죄다 농어촌으로서, 류큐계와 미국계, 한국계의 전통문화가 온전히 남아서 계승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스화나 카마키 등을 제외하고는 고급문화의 격오지에 놓여있음으로서 교양에 대한 문제가 수십년동안 제기, 이를 해결하고자 동도현에서는 1968년에 현립오페라단, 현립발레단 등을 창설하고, 문화회관이나 공영극장이 1980년대 이후 동도현정부의 주도로 각 시향진마다 최소 2개 이상은 지니도록 증설되고 있다.
해청위 연방특별구[edit | edit source]
연방정부 하 공공기관과 연방정부 출자 공기업 본부의 소재지라서, 이들을 타겟으로 한 고급문화가 발전해있다. 인위적으로 수도 이전을 위해 조성된 지역으로서, 출범 30년이 다 됬음에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문화가 발전하지는 못했다. 20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 듯 하다.
국방[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방군은 1956년 창설된 이스트코스트 시군(市軍)과 1956년 독립과 동시에 중화민국 국군에서의 잉청저우 방위지휘부(육군), 잉청저우 기지지휘부(해군)을 넘겨받고 공군을 새로 창설하는 식으로 만들었던 잉청저우 시군(市軍)을 모태로 하여 1956년 9월 잉청저우 섬과 구 이스트코스트 속령 간의 통합 직후 두 모태를 발전적으로 통합하여 만들었다.
창군 초기에는 냉전으로 중국과 대만이 중원휴전선을 두며 휴전 상황에 놓여있어 대만과 일본을 지키는 후방 기지로서 기능하기 위해 군의 규모는 작은 편이었으며, 1989년 천안문 항쟁의 성공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붕괴하며 화북이 두 입헌군주국으로 갈리고 만주가 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해 나가는 상황에서 중화민국과 만주민국, 화북 2국 간의 전시상태 종료 상황으로 군대의 체질을 개편하며 규모를 좀 더 감축했으나, 2000년대부터 중국의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일어난 군비증강과 그 이후의 패권 창출 개시,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 사태와 맞물려 군의 대대적인 보강이 이루어지며 병역자원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와중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방군에는 징집병<자원병의 통계라는 웃지못할 사태가 일어났는데, 이는 경제위기 속에서 대기업이 고용을 줄이고 기술혁신을 이루고, 공기업도 한계가 있던 만큼,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공권력 내 일자리나 공무원을 지향하거나 창업을 지향하는 등의 사태와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반군의 규모 대폭 확대가 맞물려서라고 한다.
하지만 대만과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똥군기 문화와 도를 넘는 부당대우와 인권침해로 인해서 엄청난 국민의 반발이 해당 문제가 1990년대 수면 위로 오른 이후부터 오랜 시간동안 일어나면서 2003년부터 모병제가 공론화되며 논의되기 시작한 끝에, 양안 간 전시상태 및 냉전으로 인한 대치의 종료도 20년 이상 지났고, 군의 최신화를 위해서 자원병으로만 편성해서 사기를 높여야 한단 측면까지 불거져, 결국 2015년부터 장비의 최신화를 유지하되, 모병제로 전환하고, 2개월의 기초군사교육과 추가 2개월의 군사특기교육만 받도록 전환하고, 미국의 징병대상 등록대장제도를 벤치마킹하여 전시병역대상 등록제도를 실시, 도입하였다.
창군 당시 총병력은 상비 약 8만, 예비 약 33만이었으나, 현재는 상비 약 14만, 예비 약 62만까지 늘어놨다.
역사[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섬[edit | edit source]
서양인의 도래 이전[edit | edit source]

16세기 이전의 잉청저우 직할시의 역사에는 구석기시대에 대만섬보다 늦은 시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기원전 2500년 즈음에 현재의 잉청저우 원주민의 조상이 되는 원시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넘어왔다. 그들은 2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잉청저우 지역의 고립된 환경에 놓여있었고, 그로 인해서 대만 원주민과 다른 민족인 잉청저우 원주민으로 분화하였다. 한편으로, 《삼국지(三國志)》에서 오(吳)나라가 종종 이주(夷洲)(현재의 중화민국 대만성, 잉청저우 섬)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며, 《수서(隋書)》에는 "유구국(현재의 오키나와 현 또는 현재의 중화민국 타이완성 또는 현재의 잉청저우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젠안(建安)군(현재의 중화민국 푸젠성(福建省))의 동쪽이며, 배로 5일을 가야 이른다." 라 하는 기록이 있다. 그 이후 중국인들은 이 섬을 발견하진 못했어도 이 섬의 존재를 인식하여 잉청저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1590년에는,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타이완 섬에 내렸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 때, 포르투갈 선원들이 초록으로 덮인 타이완 섬을 보고 "포르투갈어: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이란 뜻)라고 서양식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타이완 성을 "포르모사"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 때 포르투갈인 등의 여러 서양인들이 타이완 근처의 잉청저우의 두 섬까지 도달하여 탐험하면서, 아니면 중국인들에게 소문을 들으면서 현재의 지명인 "영성주", 즉 잉청저우가 알려졌다. 물론 이때부터 영성주를 瀛城州와 贏城州로 혼용해서 쓸 만큼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서구에서는 잉청을 각각의(두개의 각) 표기인 赢城 혹은 瀛城을 음차한 "뷰티풀 캐슬"이나, "씨 캐슬" 이라고도 가끔씩 불리고는 한다. 하지만 현재 영성주, 그러니까 잉청저우의 표기는 瀛城州이다.
그러나 잉청저우라고 칭했던 것은 본래 잉청저우 섬 일원의 지형 상황으로 인해서 명명 당시에는 잉청저우 섬의 남부에 명명되었으나, 훗날 잉청저우 시 일원이 되는 피란 섬에 정착하여 잉청저우 시를 건설한 한족들에 의해 본래의 잉청저우 섬과 피란 섬을 모두 잉청저우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원주민어 지명에 혼동이 왔고, 그에 따라 원주민어로 잉청저우 시를 일컬을 때는 Tokey Sepannah 혹은 본래 피란 섬 지역이란 의미로 Pyren, Tokey Pyren 등으로 일컬으며,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다.
한편 본래의 잉청저우 섬이었던 산지지역에서는 타이완의 다두왕국과 같은 연합왕국인 세판 왕국이 성립했다가 이것이 중앙집권화를 거치면서 중세 왕조같이 되었다. 세판 왕국은 언어 통합 작업을 벌여 언어를 통합하고, 각 부족간의 통혼을 장려해 잉청저우 원주민들을 민족화된 여러 부족에서 한 민족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 사이 17세기 명나라 대(明代) 말부터 유럽 상인들이 앞다투어 타이완으로 찾아 들어오면서 한족(漢族)들의 타이완 이주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잉청저우를 알게 된 일부 한족들이 넘어갈 대로 잉청저우로 넘어가면서 현재의 시내에 해당하는 잉청저우 2개 섬 중 비교적 평평한 북쪽 섬, 피란 섬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본성인이라는 대만과 잉청저우의 중국인의 구분 분류가 탄생하게 되었다.
원래 잉청저우 섬은 현재의 신잉청현의 남부 위성도시 및 향진군에 해당하는 땅만 물 위로 솟아있고, 지금의 시내에는, 역사설정에 계속 "북쪽의 섬"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하나의 평평한 큰 섬(피란 섬)이 있었는데 그 두 섬 사이의 바다를 강화도처럼 수백년 걸쳐 간척해 나가면서 1893년에 와서야 완전히 메꿈과 동시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다. 첫 간척은 1584년인데, 잉청저우 섬에 있었던 당시 세판 왕국의 백성들이었던 잉청저우 원주민들이 잉청저우 섬의 산지의 비율이 너무 높음으로 인해서 농지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간척작업에는 잉청허에 대한 준설 및 치수 공사에서 나오는 흙을 썼다고 한다. 그 평평한 섬에서는 1618년에서야 당시 이주해 정착한 한족에 의해 간척사업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양인의 도래와 정씨왕국[edit | edit source]
1624년, 펑후 제도를 점거하던 네덜란드(和蘭) 상인과 명(明)나라 군대는 네덜란드이 동인도회사가 펑후 제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타이완 섬의 서남부(현재의 중화민국의 타이난 시 일대)에 상업지구를 건립하는 데에 합의하였고, 네덜란드는 2차례 탐험을 통하여 잉청저우 섬 남단에 추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1626년~1642년에는 에스파냐인들이 타이완 섬에 들어와 타이완 섬 북부의 지룽(鷄龍, 훗날 한자명 基隆)과 서랴오섬(社寮島, 사료도, 현재의 허핑(和平) 섬 일대)를 차지하고, 산살바도르 성을 세웠다. 에스파냐는 이후에 점령지를 하쯔난(蛤仔難, 합자난. 현재의 중화민국의 이란(宜蘭) 현), 후웨이(현재의 중화민국의 신베이 시의 단수이 구) 까지 넓혔고 이 지역에 산토도밍고 성을 세웠으며, 이때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비슷한 수법을 썼지만 이제 막 한족들이 이주하는 북쪽의 섬에 식민지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에 진출한 네덜란드 세력과 에스파냐 세력 사이의 경쟁과 알력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642년, 네덜란드인들은 에스파냐의 타이완과 잉청저우 내의 점령지를 공격하여 빼앗고 에스파냐인들을 타이완 밖으로 몰아냈고, 이때 당시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를 점령해 식민지배한 목적은 중국, 한국,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서 무역우세를 점하고, 타이완 섬과 잉청저우 지역의 일부에 있는 식민지를 거점으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동아시아 지역 전역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1624년부터 1662년까지 네덜란드의 타이완 섬 및 잉청저우 지역 일부 통치는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1661년에 정성공은 타이완 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였고, 1662.2.1에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타이완 섬에서의 철수와 타이완 섬의 모든 권리 이양, 그 뿐만 아니라 잉청저우 지역의 지배권까지 약속받은 정성공은 타이완 섬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잉청저우에는 정씨왕국령과 세판 왕국이 공존하였다.
그 뒤인 1662.2.1 이후로 정성공은 타이완을 청나라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아 통치할 목적으로 명경(明京)을 세워 동도(중국어 간체자로 东都, 중국어 정체자로 東都, '동쪽의 수도')라 칭하고, 펑후 제도를 포함한 타이완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자기 휘하의 군인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온 푸젠 성 주민들을 섬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중국 본토를 수복하고 필리핀에서 에스파냐인을 몰아내고, 잉청저우에서 세판 왕국을 정복하여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662.6.23에 정성공이 병으로 급사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정경이 그 뒤를 이었으며, 1664년에 정경은 동도를 동녕이라고 개명하여 동녕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였고, 정성공의 반청(反清) 유지를 받들어 대륙에서 일어나는 복명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三藩之亂)에 적극 동조하여 한때 푸젠 성의 일부를 공격하여 장악하고서는 세판 왕국까지 멸망시켜 점령하는 데에 성공(1675.3.29)했으나, 결국 1683년에 정경이 죽으면서 정씨 정권이 정성공의 손자에게 넘어가면서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뇌물을 이용해 이러한 내부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정성공으로부터 시작한 정씨 일가의 3대(代)에 이은 타이완 통치는 21년 만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21년동안 이어진 정씨왕국의 통치시기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정씨 정권과 상업협정을 맺으려 했는데, 당시 영국인들은 동녕왕국을 타이완 정씨왕국(台灣鄭氏王國)또는 명경왕국(明京王國)이라 칭하였다.
청 복속 이후 위임통치령까지[edit | edit source]
그 뒤 청나라 푸젠성의 일부로 존속하다가, 1891년 독일제국의 탐험선이 잉청저우 섬의 중부로 들어가서 탐험하던 도중, 당시 중국계(내성인) 및 잉청저우인(잉청저우 원주민)과 싸움이 붙으면서, 청나라가 이를 해결하느라 잉청처우 섬 자체를 할양해줘야 했고, 그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독일제국령 잉청저우 섬으로 존재하였다. 이 당시 독일어를 비롯한 독일 문화가 대규모로 유입되었고, 철근구조 등의 근대식 건축구조와 신문을 비롯한 근대 문물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제정 일본이 산동반도와 남양군도라 불리우던 미크로네시아 일대를 점령한 이후 잉청저우로의 남진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그 때 영국과 프랑스의 지속적인 병력 파병 요청의 거부를 이유로 들어 영국과 프랑스의 밀실 합의로 인해 제정 일본에서 잉청저우 섬을 공략하기 1주일 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일대에서 군을 차출해 잉청저우 섬으로 진격하면서 간발의 차이로 프랑스가 잉청저우 섬을 점령했다. 결국, 그 결과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이 패망하고 그 결과인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국제연맹이 설립될 때에, 국제연맹에서 잉청저우 섬을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지정을 통한 위임통치령 설립으로 이어지며, 1920년에는 중화민국과 잉청저우에서 별도의 합의를 맺어서 50년 조차 계약을 맺고, 조계지로서의 수명이 다하는 1970년 이후에 중화민국으로의 반환 혹은 잉청저우 섬 일대를 영토로 하는 독자적 독립국가 수립 둘 중 하나를 최종적인 목표로서, 이를 이루는 과정으로 인식되게금 자력갱생을 위한 프랑스의 통치가 이뤄졌으며, 이는 식민통치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수준의 높은 자치로 이행되어 국제연맹이 당초에 의도한 위임통치의 모범이 되었고, 기존의 유입되었던 독일어, 독일 문화의 보존이 보장됨과 함께, 프랑스어, 프랑스 문화도 적극적으로 유입되었으며, 반체제 인사와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유입되고, 제정 일본의 통치를 받던 류큐인들이 먹고 살고자, 언어, 부 등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대거 이주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edit | edit source]
그러나,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잉청저우 섬을 고작 이권 챙기는 걸로 요청을 무시한 댓가랍시고[24]프랑스에게 뺏긴 한을 기억하고 있었고, 이는 결국 일제가 군국주의의 길을 밟으며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에 포함되며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일제는 홍콩, 마카오를 점령하기 2일 전 잉청저우 섬을 점령하는 데 가장 큰 원인이 되었으며,결국 1941년 잉청저우 섬을 점령한 일제는 잉청저우를 군수기지로 만들어 탈탈 털어서 전쟁을 진행하였고, 학살과 강간, 성노예 징발, 생활물자 강제징발 등의 잔학 행위를 시도했으나, 결국 이는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항일 저항운동을 역으로 불러일으켰다. 말 그대로 수탈과 저항의 연속이었으며, 레지스탕스는 전술과 병력의 한계 상, 잉청저우 섬에서 비교적 산이 있던, 남부 산간지역을 해방하고 이를 중추로 활동하였다. 상기한 잔악행위로 탄생한 '암흑의 피(暗黑之血)' 역시 4만명 정도 탄생하였다.[25][26] 그러면서 잉청저우 시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의 중심지가 되어 철저히 파괴당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잉청저우 일대에 2차로 일본인이 대거 이주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국민정부의 억압[edit | edit source]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 등을 경험한 잉청저우는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중화민국이 잉청저우 섬을 영토로 수복 할 것을, 미국이 바시 제도와 이스트코스트를 수복하고, 바시 제도를 이스트코스트에 연합시킬 것을 확약받는 등, 연합국 간의 협의에 따라 1945.10.25일에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중화민국이 대만을 접수한 직후, 그 다음날인 1945년 10월 26일에서야 일제 잉청저우 점령방면군의 항복을 받고, 프랑스와 저우산 협정을 맺고, 중화민국이 잉청저우를 접수한다. 그 후 국민당의 국공내전 와중에 화북에서 밀리는 과정에서 광둥, 산둥, 저장-장쑤-상하이 출신의 잉청저우 지역 내의 외성인이 200만의 민간인과 곳곳에서 탈출에 성공한 패잔병 100만명이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잉청저우 일대로 몰려들며, 잉청저우의 일본인들은 집단으로 귀환을 거부하며 집단으로 본성인으로 위장하기 시작한다.[27]
그러나, 그 와중에 벌어진 2.28 항쟁은 대만을 넘어 잉청저우로 확산, 그 결과 수많은 민간인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으며, 결국 외성인과 본성인으로 분류되던 잉청저우 선주한족-신 본성인이라고 불리던 본성인 위장 일본인-잉청저우 원주민 간의 갈등이 깊어져 갔으며, 이는 수차례 열린 대규모의 시민들의 독립 봉기로 이어진다. 본래 잉청저우섬은 대만과 역사적 궤적을 같이 했던 하나의 지역이었으나, 식민지배를 대만은 일본에게 받았으나, 잉청저우 섬은 독일 식민지를 거쳐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식민지배를 받았었고, 그에 따라 미세한 역사적 차이, 상당한 문화적 차이가 발생했으며, 미세한 역사적 차이는 더 커졌다.
연방의 독립과 그 이후[edit | edit source]
결국 이스트코스트의 독립 여론과 맞물려 연방화 독립 방안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지지가 급증하는 등의 독립 여론의 강화 및 격화는 계속되었고, 잉청저우는 중화민국의 골칫덩이가 되어갔다. 이미 이스트코스트와 하나의 도시권으로 기능하고 있었기에,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고, 결국 1954년부터 계속된 미국-중화민국-잉청저우-이스트코스트 4자 대표 간 독립협상이 1956년 7월까지 이어졌으며, 1956년 7월 20일, 단수이 협정으로 잉청저우 섬은 1945년 중화민국의 잉청저우 섬 접수 이후 힘겨운 독립의 길[28]을 걸은 지 11년 만에 독립하였다.
그와 동시에, 앞서 언급한 이스트코스트와의 유기적 권역이 도시권을 넘어 국가 간의 통합을 조율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결국 이스트코스트와의 연방화는 불가피했으며, 결국 제헌임시의회를 선출하여 연방 수립을 결의하고, 헌법 제정 및 선거를 통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을 수립한다. 그 과정에서 본성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 제 모습을 드러내자, 이에 대비한 법률을 제정해 그간의 탄압을 중지하고 인종적인 차별과 탄압을 절대로 못 하도록 막았다. 이를 기점으로 잉청저우의 인종 차별/탄압과 그 잔재는 1960년대 초반까지 급속도로 사장되기 시작한다.
그 이후 잉청저우 현에서 잉청저우 시, 저우산 진, 베이지 진, 쉬서우 진, 잉서우 진, 슐수이광 향만 남고 웨이팡 현과 시낭 현이 1963년에 분할된다. 이유는 잉청저우 시와 그 주변으로 몰려드는 인구로 인한 잉청저우 현의 인구 과다로 인한 생활권 분절 문제로 인해 헌법에 명시된 절차의 실시가 불가피 해서이며, 그런 분리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잉청저우현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급속히 증가하면서 잉청저우 시의 인구가 1977년 직할시 승격기준선인 100만을 넘었으며, 잉청저우 3개 현의 인구는 1980년 1000만을 넘어선다. 결국 잉청저우 시가 1982년 주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찬성으로 직할시로 승격하여 잉청저우 현에서 분리되었으며,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도 이전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하여 식량안보의 안정적 확보 목적도 갖출 겸 하여, 인공섬 해청위(海淸衛, 하이칭위, 카이세이에이)를 만들어, 이를 1991년 완공 후 해청위 섬 전체를 통째로 연방특별구로 만들어 수도를 이로 옮기었으나, 오히려 국토의 균형 성장의 고도성장화만 촉진하여, 성장세는 좀처럼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1995년 당시 잉청저우 시의 인구는 583만 명에 다다렀다.
하지만, 잉청저우는 과포화상태에 치달았고, 잉청저우의 광역권은 1995년 기준 약 1200만의 인구를 가졌을 정도로 어마어마 하였고, 결국 1990년 3월에 잉청저우현 전역이 주민 투표를 통해 잉청저우 시에 편입되는 식으로 잉청저우 시와 통합했으며, 1998년 9월에는 또 주민투표를 통해 웨이팡 현의 허슝리(和雄里) 시, 우이칭(唔依清) 시, 웨이팡 시와 시낭 현 완잉(宛英) 시, 아키나카(秋中) 진이 잉청저우 직할시로 편입되었고, 이도 또 주민투표로 웨이팡 현(스거우 진, 허량(河浪) 진, 시커우(司寇)진, 샤오왕 시, 민셩 진, 시왕 진, 왕칭 시, 양누 진, 틴샤 진, 나부샤 진, 양칭 향, 우싱 향)과 시낭 현(시낭 시, 장이 시[29], 저우제 진, 원잉(溫迎)진, 우샨 진, 스기 향, 세이란 향, 펀완 진, 마카타오 향, 망알로반 진, 비피비피 향, 카시얏 향, 먄피바티 향, 웨이칭 향, 커칭 향, 이린 향, 잉펑 향, 타갈로그 향, 부키드 향, 비사야 향, 이바탄 향, 아피얀 향, 이피만탄 향, 칼리마타 향, 마킬로스 향, 제네랄핑카밍테 향, 탄카만 향, 낭 마르테스 향, 마카타요 향, 낭 이스토치나스 향, 오리엔테 향, 난다시 향) 각 2개 현의 잔존부를 합쳐 신잉청현을 만들어냈다.
그 뒤엔 잉청저우 직할시가 1999년 7백만을 돌파하였으며,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인구가 1천만 선에서 소폭 느는 등 정체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현재는 그 작은 1만 제곱킬로미터의 연방국가의 최대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인구에 비해 균형잡힌 녹지 비율을 지니고 있으나, 교통문제가 존재하여, 지하철을 10호선까지 개통했음에도 사설철도, 광역전철까지 혼잡도 200%대를 기록하고, 도시 곳곳이 출퇴근 시엔 버스의 가축수송으로 시민들이 불편을 겪을 정도로 심각하다. 신잉청현에 속하는 잉청저우섬 남단의 경우 잉청저우 직할시 근교에 위치한 12개 현할시의 사회적 인구 증가의 지속이 있었고, 그 외는 이촌향도 등이 겹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으나, 위성도시들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기에, 상기한 행정구역 편입으로 인구 성장세가 꺾이나 싶었으나, 1990년데 중반에 증가 폭이 급격히 가팔라졌으며, 2018년에는 약 885만까지 회복하였다.
이스트코스트 섬 지역[edit | edit source]
미국의 개척 전후[edit | edit source]
본래 남방의 동남아/북태평양의 오스트로네시아인이 기원후 1세기에 잠깐 거쳐갔다 무인도로 남았던 이스트코스트 지역에 15세기부터 명,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 경쟁하기 시작하였으나, 결국 모두 경쟁에서 이득을 얻지 못하고 명이 멸망함으로 인해 모두 통째로 손을 놓고 있었던 곳을, 미국이 19세기 중반에 탐사를 통해 정보를 얻으면서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개척은 신잉청현의 도서지역을 1898년의 미서전쟁에서의 미국의 승전으로 인해 필리핀과 함께 개척함으로 인해서 시작되었다.
처음의 탐사 및 수십년의 시험개척 시에는 미국인만 들어갔지만, 인력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화교의 시초인 쿨리를 부르려고 고려했으나, 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한국인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하거나 도우려고 했고, 그런 수많은 한국인들은 북으로는 간도, 남으로는 이스트코스트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국외 이주를 결단하고 내려오게 되면서, 20만이나 되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스트코스트에 정착하였다. 이 대규모 이주 전에는 이스트코스트의 인구가 30만밖에 안되었다.
이스트코스트의 한인들은 생계를 악착같이 이어나가며 개책해 일궈나가고, 결국 정착에 성공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어들기도 하였다. 1919년 3.1 혁명 당시에 이스트코스트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만세 행진이 대규모로 일어났으며, 3.1혁명의 성공 소식을 들은 이스트코스트 한인들은 그에 따라서 이스트코스트의 한인을 하나로 모을 한인단체의 필요성을 높였다. 이로서 1919년 6월에 이스트코스트 한인회의[30]가 탄생하였으며, 이스트코스트의 한인들은 당시 제정 일본에 있던 한인들과 같이 당장 돌아가기에는 경제적인 기반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극소수만이 한국으로 귀국하고, 남은 대다수는 이스트코스트 일대에까지 제정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된 1942년까지 경제적 기반을 갈고 닦으며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연락이 닿은 한국의 친족들에게 경제 활동 및 학업 활동을 위한 송금에 매진한다.
제2차 세계대전[edit | edit source]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당시 제정 일본의 입장서 류큐 제도와 인접하였기에 침략 및 군사 전략에 용이하다고 여겼던 이스트코스트는 결국 1942년 4월부터 시작된 이스트코스트 전투를 통해서 1942년 7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에 즉각 일본군의 잔악함에 반발한 이스트코스트 주민들은 반일감정이 있던 한인들을 중심으로 게릴라 전쟁을 전개하면서, 차차 많은 미국계도 이 게릴라 전쟁에 한인들과 같은 레지스탕스로 참여하게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 낮에는 일장기를 걸고, 밤에는 성조기나 태극기를 걸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라 2년 간의 치열한 싸움과 전쟁 말 공습에 힘입어 1944년 10월 일본군을 가까스로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사이 일본은 이스트코스트의 시민을 학살, 강간, 강제징용하는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결국 전쟁 직전 인구 70만 중 전쟁학살 피해 6만, 게릴라 전사 3만, 강간피해자 4만명, 강제징용 피해자 2만명, 원치 않은 혼혈아 4만명 등을 남기며 전쟁 말의 공습 등과 함께 인명피해 외에도 수십년을 일군 시가지가 일부 콘크리트조 중층 건물을 제외하고 잿더미나 돌더미로 변하는 등의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이스트코스트 시민들은 그런 끔찍한 전화의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고, 전후 전쟁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시 정부 차원의 정신과 치료 지원 등이 이어졌으며, 이는 독립한 이후에도 이어져 지금까지도 지원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민국은 68혁명 이후 전범 청산 이은 과거사의 남은 문제의 완전 청산 분위기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를 진심으로 사죄한 이후 지속적으로 이에 대한 사죄와 기억을 수행하고 있다.
연방 독립과 그 이후[edit | edit source]
이윽고 한인과 미국계가 손잡고 그렇게 다시 악착같이 일어나면서 베이비붐이 불어왔으며, 제정 일본에 있던 한인의 상당수가 한국으로의 귀국 내지는 이스트코스트로의 이주를 선택하면서 한인 인구가 추가로 유입, 이에 따라 어떻게든 전후복구를 빠르게 끝마치려고 누력했으며, 이로서 1950년에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한다. 그리고 전후 이스트코스트 시민의 애향심이 독립 촉구의 원인으로 바뀜으로 인해서 독립 여론이 꾸준히 높아지고, 1956년, 이스트코스트의 독립을 결정짓는 주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의 찬성을 통해서 독립 쟁취를 확정짓고, 미국 의회에서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 제도 속령에 대한 독립기본법"의 통과로 독립에 성공한다. 독립이 늦어진 이유는, 독립을 하되, 전후복구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독립하자는 방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후 이스트코스트는 고도성장을 통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일원으로서 잉청저우와 함께 일본민국과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의 후방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여, 압력을 받치는 받침대로서 활용되었으나, 70년대 이후의 잉청저우 도시권의 급속한 팽창과 이스트코스트 도시권의 조직, 1970년대 후반 이후 도시화 완성단계에 접어듬을 통한 잉청저우 도시권과 이스트코스트 도시권 간의 연담화로 인한 대규모 메갈로폴리스의 탄생으로 초 거대 도시권, 초 거대 생활권을 형성, 그 결과 이스트코스트의 생산(공업) 기능은 중화학공업을 제외하고 동도현의 카만스 시와 와탄나 시, 신잉청현의 세이란 시와 잉청구팅 시 등지로 이전하고 이스트코스트는 급속도로 소비도시로 재편, 그 결과 경공업의 빈자리를 서비스업과 사무업이 메꾸게 되었으며, 현재 이스트코스트는 잉청저우의 위성도시 겸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개 거점지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산업 편중이 나타날 것을 우려한 이스트코스트 시정부에서는 2000년을 시작으로 첨단산업 유치 등의 산업 다각화를 본격 추진하게 되었다. 인구는 2013년 4백만을, 2017년에 5백만을 넘었다.
신잉청현 도서지역(바시제도-난링다오)[edit | edit source]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도서지역, 소위 바시 제도(巴士諸島) 은 북으로는 잉청저우 섬 바로 남단에서부터 필리핀 북단의 바탄제도(바타네스 제도) 근방까지 뻗어있으며, 옆에는 난링다오가 존재한다. 이들도 이스트코스트 지역과 같이 1세기 즈음에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필리핀을 통해 태평양과 마다가스카르 땅까지 곳곳으로 뻗어갈 즈음에 잠깐 거쳐간 땅에 불과하였다. 19세기까지 잉청저우와 필리핀에서 근접하는 지리적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던 이 땅은 19세기 후반 미서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며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 삼을 때 섬의 개척을 통한 식민화 가능성을 확인, 미국이 1913년 본격적인 개척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스트코스트 속령의 일부로 편입하였고, 이때부터 1933년까지 20년동안 필리핀인 개척단을 무려 160차에 걸쳐, 10만을 선발하여 보내서 개척케 하였고, 펀완과 난다시에 농민을 비롯한 한족 이민자들을 1935년부터 1940년까지 30차례 동안 총 6만명을 받았으나, 제 2차 세계대전에 의해 일제에 의해 강점됨과 동시에 대규모 저항운동으로 인한 바시 제도 수호 전쟁으로 인해 1만명 정도가 사망했으며, 상기한 카이로 선언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 자치령으로의 편입 대신 이스트코스트 속령에 재편입하는 식으로 이스트코스트 속령과 연합해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 제도 속령으로 개편, 그와 함께 전후 복구에 매달리며 인구는 베이비붐의 여파로 1949년에, 경제는 1954년에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으며, 1956년 이스트코스트와 바시 제도 속령이 이스트코스트 임시의회국으로 독립한 직후 잉청저우 섬과의 연방으로의 통합이 이루어지며 잉청저우 제도 연방이 되고 나서는 1956년 주민투표에서의 근소한 찬성 우세에 의거해 웨이칭 현에 편입되었다가, 상기한 대로 1990년 잉청저우 2차 확장 당시의 주민 투표에 의한 행정구역 대개편에 의거해 잉청저우 현의 잔존부 전체와 시낭 현과 웨이칭 현의 일부가 잉청저우 시로 편입되는 대확장을 통해, 시낭 현과 웨이칭 현의 각 잔존부가 통합되며 신잉청현이 조직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때문에, 전부 스위스의 쥐라 주 설치 이전의 베른 주 본토-쥐라 산맥 지역과 같은 민족/언어권 간 갈등이 신잉청현 잉청저우 섬 부분과 바시제도 간에 벌어지고 있어, 간간히 바시 현(또는 동부 바타네스 현) 설치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동도현[edit | edit source]
원래 이 지역은 서구 어느 나라도 아니고, 산잔시대 후반의 류큐 상인이 표류하면서(1308) 발견된 섬들이다. 이 섬들을 원래는 당시 상씨 왕조를 기리는 숭배하는 의미에서 쇼우슈가나시라는 지명이 붙었으나, 이 때는 자연만 우거진 채, 류큐인들이 개척해 잠깐 기지로만 쓰다 버려졌으나, 서구 국가들이 17세기 즈음부터 뒤늦게 발견하고 버려진 개척지들을 개보수해서 쓰다가 북아메리카 결국 미국이 19세기 후반부터 야금야금 집어먹다 미서전쟁으로 완전히 미국의 소유가 되어 이스트코스트 속령에 배후지로 편입되었으며, 이때 수소문 끝에 동도현 일대에 정착했다가 버려질 때 류큐 본토로 떠났던 이들의 후예를 찾아, 후한 조건 하에 영구 귀환을 받았으며, 이때 그 수가 4만명에 달했고, 1930년대를 전후해 먹고 살기 힘들었던 류큐인들이 8만명 가량, 동아시아 근방의 재외 한국인들 중에서 농림어업 등의 일자리를 찾아 6만명이 이주했다. 결국,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제정 일본에 점령당했을 적엔 오키나와 현을 이루는 류큐 제도와 거리가 어느정도 있는 편인데도, 잠깐 오키나와 현에 편입되었다가, 종전 이후에 도로 미국의 이스트코스트 속령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스트코스트의 일부로 1956년 이스트코스트가 독립할 떄 같이 떨어져 나간 뒤에 잉청저우와 연합해 1956년 잉청저우 제도 연방이 출범하면서 이스트코스트에서 떨어져 나와 동도현이 조직되어 지금에 이른다. 미안하지만, 요게 끝이다. 하지만, 최근 잉청저우-이스트코스트 대도시권의 팽창으로 인해, 해밀턴 섬과 이스트코스트 도시권에 속하거나 이스트코스트의 영향권 하에 있는 비(非) 해밀턴 섬 지역 간에 갈등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소지역주의가 불거지는 등의 마찰로 인해, 동도현의 관할범위를 비(非) 해밀턴 섬 지역으로 축소 및 해밀턴 섬을 동도현에서 분리해서 해밀턴 현을 설치하는 방안이 동도현에서 심도 깊게 논의되고 있다.
해청위 연방특별구[edit | edit source]
해청위로 수도를 이전하기 이전에 수도였던 잉청저우 시가 존재했던 잉청저우 섬은 국공내전과 제 2차 세계대전 전후 베이비붐이 맞물리면서, 3백만 정도의 인구가 2배를 넘는 7백만으로 불어났고, 그 결과로 인해 잉청저우 섬 일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초과밀 상태를 겪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발전과 경제의 발전으로 이들을 부양할 여력이 되었던 점 때문에, 경제 성장을 늘려가자고만 했지, 1980년대 이전에는 수도 이전이나 분산을 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자, 잉청저우 시 300만명에 지금의 신잉청현에 해당하는 시낭/웨이칭 양 현의 인구의 합이 8백만명이라는 과히 심각한 수치가 나오고야 말았고, 그에 이르러, 잉청저우 섬 북부와 중부의 도로는 매일 교통체증으로 터져 나갔고, 잉청저우 첩운은 지금의 잉청저우 직할시 시역 곳곳으로 뻗어나가면서 곳곳에서 만원에 이르는 등의 과밀화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고층 농장 기술의 개발이 없었다면, 더는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 불가능했을 정도가 되었으며, 이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의 추가 지출을 초래하였다.
이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방행정원 산하에 임시위원회로써 신수도조성위원회가 1981년 12월 출범, 곧바로 신수도 조성지를 6곳 꼽아서 입지 선정 등에서 경합을 벌인 끝에 1983년 9월에 지금의 해청위 연방특별구 자리를 신수도로 지정해, 1985년에 조성 공사에 들어가 1990년까지 조성한 뒤에 해청위 연방특별구를 출범시켜, 수도를 이전하기로 했다. 해청위 연방특별구라는 신수도 조성의 대사업에 국운을 걸고 1985년부터 1990년까지 5년 동안 국내의 건설사들로는 한계가 있어, 한국의 현대건설, 청구주택, 삼성건설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많은 인력과 중장비, 공법 등을 총동원하고, 세계 곳곳에서 많은 골재를 사들여 해청위 연방특별구에 쏟아붓는 등의 사업을 벌이고, 이를 평탄화하는데 많은 수고가 들어, 수천 명의 부상자가 평탄화 과정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이럼에도 잉청저우의 과밀화가 날로 심화되어서 공사를 중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도시화로 갈 곳을 잃은 농민이 나오기까지 하면서, 이들의 해청위 이주 및 개척을 약속하기까지 하며 공사는 계속 진행, 그로써 수도 조성은 1990년까지 예상대로 진행되어, 해청위, 안밍, 신메이리다오 3개의 도시계획지구와, 진좡, 소라카미, 에이세이슈마츠우라 3개 향진을 개발/조성, 신수도를 조성하였다.
이후 1990년 해청위 연방특별구를 연방총통령에 근거하여 출범, 1993년까지 법제 정비[31]를 마침을 통해 해청위를 수도로 지정해 천도했고, 1993년에서 1997년까지 연방행정원의 이전을 시작으로 연방오권(연방정부)의 소재지를 해청위로 옮김으로써 수도 이전을 마무리지어 지금에 이른다.[32]
교육[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교육은, 잉청저우 직할시 지역에 한족이 정착하면서 서당 교육 등의 동아시아적 교육이 시작되던 17세기부터 그 역사의 궤를 같이 하며, 양무운동이 한참 실시되던 1883년에 국립 잉청저우 대학의 전신인 잉청저우 양학관[33], 잉청저우 제일연방중학, 국립 잉청저우 제일고등중학의 전신인 잉청저우 고학당(高學堂) 및 잉청저우 중학당, 국립 잉청저우 제일소학교의 전신인 잉청저우 소학당이 당시 잉청저우의 한족들에 의해 들어서면서 신식교육(서양식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00년에 독일 식민당국이 독일인에게 이권을 편중하고 식민지를 제국주의 그대로 착취하려는 강력한 식민 정책에 의해 식민당국이 위의 학교들을 비롯한 청나라 시절부터 내려온 여러 중국계(한족계) 관립학교를 강제 인수해, 독일식 학제의 정규 초중-김나지움 내지는 대학으로 변경하였고, 그와 동시에 잉청저우의 학제를 독일식 학제로 강제로 통폐합하였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함과 동시에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의 변화를 통해 프랑스식 학제가 도입되어 또 다시 개편되었다가, 1942~1945년까지는 일제 점령 하에 구학제도 일제 입맛에 바뀔 뻔 하였다가, 1945년 국민당의 잉청저우 입성 이후 현재의 학제로 재개편 되었다. 이스트코스트는 1870년대 후반에서 1880년대 중반에 걸친 초중고교의 개교가 이루어짐에 힘입어, 1892년에 이스트코스트 대학(현재의 국립 이스트코스트 대학)와 속령립 대학(현 이스트코스트 시립대학)가 들어서면서 대학교육이 시작되었다. 그 후 1900년대에 사립대학들이 개교하였으며, 미국의 학제가 자리잡았으나, 일본 점령 하에서 잉청저우와 같이 일제 입맛에 맞게 바뀔 뻔 했다가,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학제로 복귀했다. 그 이후, 1956년 연방 출범과 동시에 직전 종주국/식민국이던 미국과 중화민국이 공통적으로 지닌 학제인 6-3-3-4제로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확립된 오늘날의 학제 하에서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교육은 대만과 미국, 일본의 영향을 받으면서, 최종적으로 미국의 자유적 교육, 대만의 공경-예의 기반 교육, 일본의 입시적 교육을 융합하되, 입시에 과도한 경쟁을 하지 않도록 하면서 아이들의 개성을 지원해주어 진로를 보장하는 구조로 수렴진화한 교육 제도가 만들어졌다.
현재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학제는 6(초등학교)-3(중학교)-3(고등학교)-4(대학교) 학제이다. 그 이전에 3년동안 들아가는 유치원도 존재하고 있지만 말이다.
잉청저우 직할시에는 10개의 종합대학이, 이스트코스트에는 4개의 종합대학이 있다. 그 외 원격대학으로서 연방국립 개방대학을, 특수목적대학으로 잉청저우 제도 연방 연방군 산하의 육군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공군사관햑교를 두고 있으며, 해당 원격대학도 종합대학이다. 이들 모두 대학 정원이 최소 4만명~최대 10만명[34]에 달하며, 유소년층 인구 및 생산가능 인구가 적다 보니[35], 각 군 사관학교를 제외하고는, 유학생을 최소 20%~최대 50%에 달할 정도로 많이 받는다. 종합대학은 대학교로 불리며, 이들은 모두 평준화 되어 있다.[36]
그렇게 많은 정원을 자랑하는 대학교만으로도 사회에 필요한 모든 인재를 수용할 수 있지만[37], 고등직업교육의 수요, 즉 대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재의 수요를 책임질 전문대학은 단 한 곳의 학교도 없다... 외국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청저우 제도 연방이 공론화에서 머무른 채로 전문대학 도입을 거부하는 이유는, 애초에 대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재가 필요한 경우엔, 한국의 특성화고나 마이스터고에 해당하는 고등직업학교[38]에서 모든 해당 필요 인재를 양성하고 수용/고용 하는 상태라서, 전문대학의 수요가 크게 뒤떨어져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엔 고등직업학교로는 직업교육에 한계를 느낀다고 생각하는 기업과 점포 등의 일자리 공급자(교육 수요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추세라서, 전문대학 제도 도입에 대해서 다시 숙의에 들어갔다.
행정구역[edit | edit source]
- ↑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현행 행정구역도
4K 지원
행정체계[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다음과 같은 행정체계를 지니고 있다.
연방주체 | 시구향진 | 최소행정단위 | 제4급 |
---|---|---|---|
2 직할시[39](直轄市) | 18 구(區) | 리(里) | 린(鄰) |
3 현[40](縣) | 23 현할시(縣轄市) | 동(洞) | |
18 진(鎮) | 촌(村) | ||
47 향(鄉) | |||
5 | 88 | 2,513 | 38,367 |
1958년 연방 출범 시엔 잉청저우 주 산하에 잉청저우 현, 시낭 현, 웨이칭 현, 동도 현, 이스트코스트 시(직할시)만이 존재했으나, 1982년 잉청저우 시의 직할시 승격/분리독립, 1990년 잉청저우 대확장에 의한 시낭 현과 웨이칭현의 통합으로 인한 행정 대개편에 의해 신잉청현의 탄생과 1991년 해청위 연방특별구의 출범에 의해 지금과 같은 2현 2시 1특별구 연방주체 체제가 되었다.
행정구역 승격-분리, 통폐합 요건[edit | edit source]
행정구역의 승격 혹은 분리, 통폐합의 요건은 1956년 건국 당시에 처음 정해진 이후로 연방주체 간의 합의를 통해 연방 헌법 및 법률, 각 시/현/특별구의 헌법 및 법률에 근거해 6차례(1963년, 1970년, 1982년, 1996년, 2008년, 2019년)씩 조정되어왔는데, 인구 요건이나 행정구역 통합에 관련된 조항의 신설이었으며, 최근 조정인 2019년 조정에서는 향의 분리(신설) 요건을 추가하였다. 2019년 조정에서 확정된 행정구역의 승격 혹은 분리, 통폐합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 연방주체 승격-분리 요건
:직할시 - 현할시의 인구가 100만 이상일 경우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현 - 분리하려는 지역의 인구 총합이 50만명이 넘으며, 10개 이상의 시/향/진으로 구성된 지역에서 전체 유권자의 1/3 이상이 현 신설 청원에 서명하여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뤘을 때에,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특별구 - 수도 분산 등의 국가적 정책으로 인해 특별히 연방에서 국가적 정책을 수행하는 지구를 지정하여 해당 지역을 연방총통령 혹은 연방행정원령으로 분리시키는 경우[41]
- 연방주체 통폐합 요건
:직할시의 승격 - 해당 통폐합을 시행할 2개 이상의 직할시 혹은 직할시와 모현(母縣) 혹은 인접 현에서 인구가 인구 감소로 인해 100만명 이하로 내려간 곳에서 연방 헌법 및 시/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직할시의 2개 이상으로의 분리 - 직할시로 두기에 애매한 면적 5천 제곱킬로미터를 넘는 광대한 면적의 직할시에서 연방 헌법 및 시/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현 - 해당 통폐합을 시행할 2개 이상의 현의 인구가 50만명 이하로 내려간 상황에서, 10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현 통폐합에 찬성하여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뤘을 때에,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 시구향진 승격-분리 요건
:구 - 직할시 내에서 분구 시의 피 분구 지역에서 분구하게 되는 지역이 인구 20만 이상인 지역에서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현할시(시) - 인구 5만명 이상, 주민 60% 이상이 해당 행정구역에서 2•3차 산업에 종사하거나 도시권이나 생활권 중심지로의 통근을 통해 2•3차 산업에 종사하는 등의 승격-분리 요건을 충족한 향이나 진에서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진 - 인구 2만명 이상의 향 혹은 향/진 내에서 2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지역이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향 - 3개 이상의 자연부락이나 하나의 작은 중심가 마을을 주축으로 뭉친 일정한 영향권에 들어가있는 작은 지역에서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 시구향진 통폐합 요건
:구 - 직할시 내에서 통폐합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인구 20만 이하로 인구가 감소하여, 통폐합 대상으로의 지목 일시에서 5년 내로 20만 이상으로의 인구 증가 요인을 유치하지 못한 상황에 처한 구에서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현할시(시) - 현 내에서 내에서 통폐합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인구 5만명 이하로 통폐합 대상으로의 지목 일시에서 5년 내로 5만 이상으로의 인구 증가 요인을 유치하지 못한 상황에 처한 시에서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진 - 현 내에서 내에서 통폐합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인구 2만명 이하로 통폐합 대상으로의 지목 일시에서 5년 내로 2만 이상으로의 인구 증가 요인을 유치하지 못한 상황에 처한 진에서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향 - 향을 이루는 3개 이상의 자연부락 혹은 향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작은 중심가 마을이 크게 쇠퇴하여 존속이 매우 힘들어져 통폐합의 대상으로 지목된 향에서 연방 헌법 및 현 헌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치뤄서 33.3% 이상 투표한 상황에서, 전체 투표 중 유효표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을 경우
행정구역 목록[edit | edit source]
현재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광역자치단체[edit | edit source]
기초자치단체[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직할시
- 시구(西區)
- 둥구(東區)
- 베이구(北區)
- 중구(中區)
- 난구(南區)
- 중정구(中正區)
- 주오구(中央區)
- 기타요시구(北吉區)
- 아키나카구(秋中區)
- 저우제구(周界區)
- 완잉구(宛英區)
- 주산구(州山區)
이스트코스트 직할시
- 웨스트 구(West District)
- 이스트 구(East District)
- 노스 구(North District)
- 사우스 구(South District)
- 센트럴 구(Central District)
- 하버 구(Harbor District)
신잉청현
- 장이 시(姜宜市)
- 시낭 시(西囊市)
- 리샤오 시(李小市)
- 거랴오 시(葛遼市)
- 신자이 시(新嘉義市)
- 샤오왕 시(蕭往市)
- 민셩 시(民生市)
- 시왕 시(希望市)
- 왕칭 시(瀇清市)
- 잉청구팅 시(瀛城古亭市)
- 우샨 시(武山市)
- 스기 시(杉市)
- 세이란 시(清蘭市)
- 펀완 시(分灣市)
- 양뉴(楊紐) 진
- 틴사 진
- 나부샤 진
- 마카타오 진
- 망알로반 진
- 비피비피 진
- 카시앗 진
- 먄피바티 진
- 우싱(武興) 향
- 웨이칭(衛慶) 향
- 커칭(可淸) 향
- 잉펑(英豊) 향
- 이린(宜林) 향
- 양칭(楊晴) 향
- 안밍(岸明) 향
- 나카틴 향
- 이칸타 향
- 마타나오 향
- 중구(中谷) 향
- 화안(華岸) 향
- 둔칭(屯靑) 향
- 탄링(灘凌) 향
- 통핑(通平) 향
- 타갈로그 향
- 아바디아노 향
- 샥캰 향
- 이바탄 향
- 아피얀 향
- 이피만탄 향
- 야규퍈 향
- 칼리마타 향
- 반줼라 향
- 탕테 향
- 부롤 향
- 실랑얀 부롤 향
- 바욜렌테 향
- 달랑히타 향
- 난다시(南大西) 향
동도현
- 카만스(嘉滿首)시
- 와탄나(渡納)시
- 카마키(鏡卷) 시
- 스화(楚覇) 시
- 시사이드-온-이스트코스트 시
- 이스트아일랜즈(동도, 도시마, 둥다오, 東島) 시
- 웨스트웨틀랜드 진
- 시틀랜드센트럴 진
- 진평 진
- 미틀락 진
- 락틀랜즈 진
- 뉴메사추세츠 진
- 뉴미시시피 진
- 이스턴랜즈 진
- 뉴오리건 진
- 뉴애팔래치아 진
- 노스웨틀랜드 향
- 센트럴웨틀랜드 향
- 이스트웨틀랜드 향
- 시틀랜드웨스트 향
- 시틀랜드이스트 향
- 시틀랜드노스 향
- 시틀랜드사우스향
- 평안 향
- 신가락 향
- 재평 향
- 남석 향
- 구평(久平) 향
- 채널 향
- 뉴 로키랜즈 향
- 클라우디비치 향
- 파인트리타운 향
- 뷰티풀플레인 향
- 터틀포트 향
- 호프랜드(hopeland) 향
- 락마운틴즈 향
- 인랜드(inland) 향
헌법[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 헌법은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헌법이다. 단수이 협정으로 인한 잉청저우의 독립 직후 이스트코스트도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면서 연방 구성 작업에 들어갔을 때 무수한 제헌임시의회 내에서의 싸움 끝에 법계도 대륙법계로 통일키로 하였기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 헌법은 대륙법계 하에서 독일식 연방제에 대통령제와 중화민국의 오권분립을 혼합한 지금의 체제로 헌법이 구성되었으며, 1956년에 제정해 몇 차례 실시한, 급변한 시대에 맞추고자 한 개헌으로써 현행 헌법이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각 연방주체들의 헌법과 법률의 제정이 가능하며, 그에 따라 모든 연방주체가 헌법을 갖추었다.[42]
각주[edit | edit source]
- ↑ 통용병음 기준으로는 Yíngchéngjhouzhudǎoliánbang
- ↑ 대만민난어 백화자 기준으로는 êng-siânn-tsiu tsu-tó liân-pang
- ↑ 하카어 백화자 기준으로는 îng-sàng-chû chû-tó lièn-pâng
- ↑ 월병(粤拼) 기준으로는 Jing4Sing4Zau1 zyu1dou2 lyun4bong1
- ↑ 우어 로마자 전사 기준으로는 Yinzentzoetsrtaulipaan
- ↑ 히라가나 기준으로는 えいせいしゅうしょとうれんぽう
- ↑ 히라가나 기준으로는 いいしいしゅうしょちょうれんぷ
- ↑ 국토가 동서로 길어서, 시간대를 정하기 애매해서 이와 같이 정했으나, 시간대 분할이 오히려 연방의 결속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압도적이라서, 2019년부터 준비를 시작해, 3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22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UTC+8의 YCST로 통일하게 된다.
- ↑ 중화민국에서는 잉청저우-타이완 판이라고 부르며, 이를 병기할 수 있도록 국제적인 배려가 되어 있다.
- ↑ 캘리포니아 공화국에 소재한 샌안드레아스 대단층 다음으로 위험도가 높은 단층으로 분류되며, 300년 주기로 지진이 발생하기로 유명했다. 최근 발생한 지진은 1999년에 중화민국 타이완 성 난터우 현 지지 진에서 발생한 921 대지진이다. 샌안드레아스 단층과 다르면서도 위험성을 높이는 것은, 이것이 바시 단층 등의 다른 단층과 지체구조 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각 단층 연쇄 지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 ↑ 넓은 의미의 바시제도는 바시제도에 난링다오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 ↑ 이 중 98%는 백인 출신, 2%는 아시아계 출신
- ↑ 민상법 부문과 형법 부문, 헌법 부문, 법원행정처의 역할을 하는 사법원 본원 핵심부문 등으로 나뉘어있고, 이 중 헌법 부문은 헌법재판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사법원 본원에 대해서 핵심부문만을 존속시키고 나머지 부문은 헌법재판원, 중앙최고민상법법원, 중앙최고형사법원으로 독립시키면서 세가지로 나누자는 안건이 공론화되고 있다.
- ↑ 홍콩을 광둥어로 이르는 이름
- ↑ 잉청저우를 대만민난어로 이르는 이름. 하카어(객가어)에서는 잉솅치우라 하며, 광둥어(월어)로는 잉싱자우라고 한다.
- ↑ 건설업, 운수업 등
- ↑ 1990년대부터 요츠자와 일대의 초고층 재개발이 논의되면서 요츠자와 반농반어촌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농민당과 녹색당의 주도로 '요츠자와를 지켜내자' 운동이 벌어져 이를 30년 가까이 막아내고 있다.
- ↑ 물론 2.28 항쟁의 경우에는 뜻하지 않은 현대사의 암울한 부분으로 인해 일어나는 특수인 만큼, 상인들도 2.28 항쟁 희생자를 기리는 차원에서 2.28 항쟁 전후로는 검은 옷을 입으며 희생자들을 기리고, 그에 맞춰 가게를 흑백의 추모 분위기로 꾸미며, 유흥업소의 경우에는 2.28 항쟁 기념일이 있는 주와 그 전주, 그 뒷주 하여 총 3주(2월 셋째 주~3월 첫째 주)동안 영업을 하지 않고 일시 휴업하는 관행이 존재한다.
- ↑ 1957년 대회에서 처음 참가한 이래로 1960년, 1978년, 1989년, 1996년, 2009년, 2015년 이렇게 6번이다. 유라시아 전체 합산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은 2006년 대회와 1972년 대회로, 그 중 1972년 대회의 우승은 리우허핑 전 연방총통의 순애보와 연관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쿵즈량(孔摯良, 광둥어로는 헝즈렁)이 자신의 동급생이었자 짝사랑이었던 리우허핑의 암울한 개인사를 듣고, 이를 위로해 주고자 자신의 모국어 중 하나인 광둥어로 리우허핑에게 헌정하는 노래였던 자회빛 속의 미래(紫灰內的未來)를 작사/작곡, 이를 유라시아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전시키려 했고, 쿵즈량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1972년도 유라시아비전 송 콘테스트 국가대표가 되며 출전하여 유라시아비전 송 콘테스트의 전체 우승을 거머쥐게 된 것인데, 이는 해당 곡이 정치적 사안에 관련된 곡보다는 역사적 사안에 관련된 곡 겸 개인 서정적 사안에 관련된 곡으로 받아들여져 쿵즈량이 대회에 출전하게 됐으나, 이 노래가 작사/작곡된 배경이 대회 중에 알려지면서 유라시아 전역의 사람들의 감동을 사 1등을 차지할 수 있었고, 결국 쿵즈량에 의해 이 노래의 대만민난어, 하카어, 표준중국어, 류큐어, 일본어(!) 번안본도 녹음하게 되며 사람들 사이에 유명해져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 발매량 1위를 기록하였으며, 당시 유라시아비전 송 콘테스트의 파이널이 치러지던 1972년 3월에 리우허핑은 자신의 국민대회 집무실에서 텔레비전으로 쿵즈량이 해당 곡을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암울한 개인사가 떠올라, 그 순간부터 몇 시간을 통곡해서 병원에 실려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리우허핑은 기적적으로 살았으며, 이후 이러한 사실이 잉청저우 제도 연방 전역에 알려지며 리우허핑의 인지도가 급증하면서 그 이후 리우허핑은 최연소 연방총통까지 당선되는 탄탄대로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쿵즈량은 리우허핑과 연이 이어져 사귀게 되어, 1975년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이후에 이 노래를 공연할 때는 리우허핑이 정계에서의 일이 있을 때를 빼고는 리우허핑-쿵즈량 부부가 이 노래를 공연한다고 한다.
- ↑ 이것이 유지되는 데에는 동아시아에서 중화민국과 잉청저우 제도 연방만이 DVB-T2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임이 제일 크다.
- ↑ 대만에서 케이블 방송이 활성화 된 것은 산이 많아 난시청 환경에 놓인 지역이 상당하다는 점과, 외성인을 우대하고 내성인과 그 외 민족들을 차별하고 그들의 요소를 탄압하는 형태의, 헌정과 훈정을 섞었다(!)는 그 악명높은 국민당 주도의 3당 연정(사실상 일당독재) 때문이다. 그런데 잉청저우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 기간도 11년 정도일 뿐더러, 잉청저우 대평원의 존재에 그 잉청저우 대평원에 인구의 2/3이 몰려 있어서 전자에는 안 속하기 때문일 뿐더러, 외성인의 비율이 대만 평균보다 높다.(대만은 약 13~14%, 잉청저우는 약 16%) 그래서 필요성이 반감되니, 활성화가 더디었다.
- ↑ 아무리 뜻이 맞아 연방이 되었어도, 두 섬으로 서로 떨어져 있던 작은 섬나라들이 하나의 크기가 좀 있는 연방국을 이루면서도 서로 가치관을 맞추려면 최소 한 세대 이상은 걸린다. 분단국가들이 통일 이후에 겪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후유증과 증상이 완전히 똑같다! 심지어 이 두 지역들은 각각 통합 전에는 싱가포르처럼 섬 자체가 도시국가였다!
- ↑ 다만, 이들 류큐인들의 선주 마을은 수백년동안 버려졌음에도, 1930년대를 전후로 일부 류큐인들의 집단 이주 하에 재건되었다.
- ↑ 실제로 침공 명분에 이걸 내걸 정도로 제정 일본, 즉 일제가 잉청저우 섬을 침공할 명분은 진실이건 거짓으로 만들어내건 간에 해당 명분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 ↑ 이들 혼혈은 주로 한족 본성인 여성이나 류큐인 여성이 어머니인 경우가 많아, 2/3이 모계 정체성인 잉청저우 본성인 내지는 류큐인의 정체성을 택했고, 나머지 1/3만이 부계 정체성인 일본인의 정체성을 택했다. 실제로 국립 잉청저우 대학에서 1970년대에 이뤄진, 이들을 추적한 결과 모계 정체성을 택한 이들은 본성인이나 류큐인과 결혼하였으며, 부계 정체성을 택한 이들은 일본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다만 출산율은 전자(평균 2.1명(1976))보다 후자(평균 2.6명(1976))가 높았다고 한다.
- ↑ 전 총통 리우허핑(劉和平, 일본어명 후지와라 헤이와(藤原平和))도 이 케이스에 속한다. 그나마 잉청저우 제도 연방이 독립한 뒤에 1967년 정치를 시작하고 나서 사연이 알려저 1969년 생물학적 아버지와 재회했으므로 그나마 나은 케이스이다. '암흑의 피'에 속하는 이들 상당수는 대학 입시 혹은 취업 과정에서야 알게 되고 정체성을 특정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 리우허핑의 경우에는, '암흑의 피' 모두가 그러했듯이, 특성 상 자신이 그런 추악한 역사의 결과였단 점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일본인 혈통의 혼혈성을 잉청저우 제도 독립 전까지는 숨기고 살아야 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드러내기 쉽지 않았을뿐더러, 그간 잉청저우에서 산 세월이 길어 일본에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이미 잉청저우의 선진적 민주주의 정치의 수혜를 입고, 배우고, 그 선진적 민주정치에 몸담으며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중진 정치인이 되었던지라, 결국 잉청저우 제도 연방을 택한, 잉청저우 본성인 내지는 류큐인의 정체성(모계 정체성)을 택한 케이스이다. 그는 먼저 서술한 이유로 인해 상기한 일본어명도 생물학적 아버지와 재회하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 ↑ 현재는 이들의 후대 세대도 태어나면서 400만명 가량 된다. 이들은 월 중국계/오 중국계/산둥 중국계 등으로 나뉘었다.
- ↑ 실제로 현실에서 메이리다오 사건(美麗島事件)에 대한 평가나 현실에서의 중화민국 민주진보당 창당 이후 대응만 봐도 장징궈 집권기라서 가능한 것이었지, 장제스였다면 다 사형시키고도 남았다 할 정도로, 장제스는 강경노선 그 자체였으니 말 다했다.
- ↑ 시낭 시와 장이 시는 시가지 연담화 문제로 인해 1992년 2월 주민투표에서 통합을 결의, 1992년 7월에 통합 장이 시를 출범하는 식으로 통합하였다
- ↑ 이스트코스트 재류한국인 거류민회를 거쳐 현재는 이스트코스트 한국계시민회가 되었다.
- ↑ 개헌이 불가피해서 개헌도 실시했고, 수도 이전에 관련된 834개의 법률을 개정 및 제정했다.
- ↑ 그래서 해청위는 1993년에서 1997년까지 명목수도 겸 행정수도에 불과했다.
- ↑ 1900년에 독일 식민당국이 인수하며 독일 식민지정부 하 잉청저우 대학(잉청저우 대학당)이 되었다가, 일제 점령 하 잉청저우 제국대학으로 강제 개편 되었고, 1945년에 중화민국 국민정부 진주로 인해 중화민국 국립 잉청저우 대학이 되었다가, 1956년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성립으로 (잉청저우 제도 연방) 국립 잉청저우 대학이 되었다.
- ↑ 연방국립 개방대학은 예외적으로 정원이 30만명이다. 그러나 그 30만명 중에 20대 초중반의 비율은 5% 이내이다. 대부분 40대 이상이다.
- ↑ 1980년대 이후 출산율이 1명대 후반~2명대 중반을 오가는 상황에 있으며, 이로 인해 매년 50만명대 초반~70만명대 초반이 태어나는 상황을 가정했을 경우, 대학진학률을 대입하면 겨우 20만명대 중반~30만명대 중반이 되는 상황에서 결국 결원 사태가 속출할 수 밖에 없다.
- ↑ 애초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 특성상 중산층 이상이 되거나, 중산층 이상의 계층을 유지하려면 주변국인 한국, 중화민국, 일본민국, 류큐공화국 등으로 유학 가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그랬으나, 1980년대 이후 현직 연방총통인 안징후이와 같이 잉청저우 제도 연방 내 대학을 졸업하고 성공하거나 계층을 유지하는 사례가 나오고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교육 수준도 자연히 올라가면서,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대학들은 전체적으로 수준이 올라가면서 자연스러운 상향적 표준화가 어쩌다(!) 완성되었다.
- ↑ 정작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대학 진학률은 1950년대 후반 평균 17%, 1960년대 평균 35%로 크게 올랐으나, 1970년대 이후로는 50%대에서 정체 중이다. 애초에 진학하는 대학이 1970년대~1980년대 외국의 유명 대학들에 진학하는 풍토에서 1990년대 이후 자국 대학들로 바뀐 것일 뿐이다.
- ↑ 학력은 고등학교와 동등하다.
- ↑ 잉청저우 직할시, 이스트코스트 직할시
- ↑ 신잉청현, 동도현, 해청위현
- ↑ 특별구 제도가 생겨난 것이 수도 이전에 관련되어, 해청위 연방특별구를 조성하고자 만든 제도라서 분리 혹은 지정의 요건만이 존재하고 있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자면, 승격과 통폐합의 요건이 없다는 것이다. 특별구는 연방정부에서 직할 통치하되, 한국의 시/도 수준의 지방자치 수준을 누리게 하면서, 시/향/진 역시 한국의 시/군 수준의 지방자치 수준을 누리게 한다. 즉, 위임사무로만 지방정부가 유지되는 셈이다. 그래서 (연방)특별구는 특별히 연방특별구의 헌법과 그에 근거한 지방정부만은 존재하지만, 법률에 한해서는 특별구만의 법률만을 만드는 것이 아닌, 연방 법률 중에서 특별구에만 적용되는 법률로 대신한다. 이는 해청위 연방특별구의 헌법에서 그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독일식 연방제와 오권분립의 혼합을 채택한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특성상, 「해청위연방특별구의선출직에대한법률」을 통해 연방입법위원과 연방국민대회 국민의원을 선출하게 함을 통해 워싱턴DC로 대표되는 미국의 특별구 제도와는 다른 차별점을 둔다.
- ↑ 사실 해청위 연방특별구를 수도 이전과 함께 워싱턴 D.C.를 본딴 연방 직할지역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독일식 연방제와 오권분립을 융합한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체제 하에서는 그것의 합법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반려되었고, 헌법과 지방정부를 두되, 연방특별구만의 법률을 만들지 않고, 연방 법률 중에서 연방특별구에만 적용되는 법률을 따로 만드는 식으로 이를 대체하며, 지방정부에 대해서는 한국 수준의 경성 지방자치를 통해 위임사무만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식으로 지방정부가 업무를 수행하는 애매한 체제를 도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