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징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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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징후이
安靜輝
안징후이 서명.png
잉청저우 제도 연방제16,17대 연방총통
임기 2016년 12월 20일 ~ 2020년 12월 19일 (1차 임기), 2020년 12월 19일 (2차 임기) ~
전임: 장 드 펠릭스(제15대)

신상정보
출생일 1968년 4월 29일(1968-04-29) (55

세)

출생지 잉청저우 제도 연방 잉청저우 제도 연방 신잉청현 장이 시 장이중앙리
본적지 중화민국 (민주의 여명 세계관) 광둥 성 중산 시
정당 자유당
학력 국립 잉청저우 대학(정치학 학사/역사학 석사/도시학 박사)
배우자 쉬잔서우(徐幹首)
자녀 2남 2녀
부모 아버지 안싱저우, 어머니 딩잔훙
안징후이
安靜輝
신잉청현 장이시장
임기 1992년 9월 15일 ~ 1996년 9월 15일
전임 왕시양
후임 우서칭
잉청저우 제도 연방 제 11대 연방입법위원
임기 1996년 11월 25일 ~ 2000년 11월 25일
전임 저우웨이춘(周衛瑃)
후임 (연임)
잉청저우 제도 연방 제 12대 연방입법위원
임기 2000년 11월 25일 ~ 2004년 11월 25일
전임 (연임)
후임 (연임)
잉청저우 제도 연방 제 13대 연방입법위원
임기 2004년 11월 25일 ~ 2008년 11월 25일
전임 (연임)
후임 루샹링(盧香玲)
신잉청현 현지사
임기 2012년 9월 15일 ~ 2016년 9월 15일
전임 칼랏 우랴 마싯
후임 양춘싱
신상 정보

안징후이(중국어: 安靜輝)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제 15대 연방총통이다.

일생[edit | edit source]

1968년 신잉청현 장이 시[1]의 중심지인 장이중앙리(姜宜中央里)의 외성인[2] 집안에서 4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중화민국 광둥 성 중산 시 출신인 외성인에다가, 광저우에서 링난대학을 졸업하고 중국국민당의 지역 중책으로 있었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잉청저우에서 살아남고자 기술을 배운, 장이 시에 거주했던 전자제품 수리원이였으며, 어머니는 중화민국 저장 성 항저우 시 출신이면서 본래는 대학을 졸업하고 상하이에서 번역가로 근무하다 국공내전 당시 피난하여 정착한 이후 결혼으로 경력이 단절되었으나, 안징후이가 태어날 당시엔 어떻게든 다시 취업해 식당에서 일하던 종업원이었다. 7세에 장이중앙국민소학에 들어가서 13세에 졸업했으며, 이 당시 성적은 중위권에 있었다. 장이중앙국민중학, 장이중앙고등중학에서는 학내 자유주의자 모임에서 활동할 정도의 자유주의 사상의 조류에 투신, 결국 자유당 최고의 청소년 인재로서 쓰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성적에 신경을 쓰며 국립 잉청저우 대학을 들어갈 수준으로 성적을 향상시켰고 대학에서도 학구파 대학생과 자유주의 활동가를 겸했으며, 그 결과 국립 잉청저우 대학을 졸업, 국립 잉청저우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 역사학 석사, 도시학 박사를 각각 취득한 토착 엘리트 출신 자유주의자가 되었다.[3]

정치에 뛰어들다[edit | edit source]

대학 학사과정의 와중에서 행동해온 것과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본격적인 정치에 뛰어들고자 한 안징후이는 1992년 신잉청현 장이 시장 자유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으며, 장이가 고향이라는 점을 어필하여 접전 끝에 1등으로 경선에서 당선, 자유당 신잉청현 장이 시장 후보가 되어 신잉청현 장이 시장 선거에서 46.8%라는 득표율을 얻으며 가까스로 0.6%차로 1위로 당선되었다. 이후 역사학 석사과정과 시장 업무의 병행을 통해 역사인식과 역사적 소양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연일 화제를 모으고 다녔으며, 장이 시의 불편한 교통인프라를 개선하고자 당시 착공을 시도한 사설철도 노선을 허가하고, 장이 시의 버스 노선 체계를 간선과 지선 두 가지로 개편하는 대신, 버스 노선을 많이 만들도록 하여 교통인프라를 개선시켰으며, 장이 시의 남서부와 옛 시낭 시의 동부 지역에 대한 민간 기업의 신도시 개발 허가를 내주었다. 이에 시장 임기가 끝나고 바로 1996년 연방입법원 선거에서 둥위안장이 선거구에 출마, 47.9%의 득표율로 접전 끝에 2위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1998년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도시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계속해서 국회의원 업무와 학업을 병행해 나갔으며, 2000년 연방입법원 선거에서도 역시 같은 선거구에 출마, 50.8%의 득표율로 1위로 당선되었다. 그 이후, 2004년 연방입법원 선거에서 49.2%의 득표율로 2위로 3선까지 성공하였으며, 2005년 기어코 박사학위를 따 내고 순전히 국회의원 업무에만 집중했으나, 2008년 선거에서는 2012년 지방선거를 고려하여 불출마, 그동안 국립 잉청저우 대학의 도시학 전임교수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신잉청현 현지사를 거쳐 연방 총통의 길로[edit | edit source]

그러면서 안징후이는 2012년 지방선거에 출마하기로 결단, 이를 잉청저우시보와 자신이 재직하던 국립 잉청저우 대학에 알리었다. 다만 출마지를 알리지 않았기에 지방선거가 6달을 앞둘 때까지도 잉청저우 직할시장, 본래 출마하던 신잉청현 장이시장 등 여러 추측이 난무하였다.

그렇게 2012년 2월 말, 안징후이는 국립 잉청저우 대학 도시학과 교수직을 사직하였고, 3월 15일 안징후이는 출마지를 밝혔는데, 아무도 추측하지 못한 신잉청현 현지사였다. 이에 자유당 내부의 안징후이에 호의적인 온건파 의원들은 당황하며 안징후이에게 다른 출마지를 가져다 주며 신잉청현 현지사 출마를 무마하려고 애썼는데, 이는 신잉청현이 잉청저우 섬 중부에 속하는 북부의 잉청저우 근교 위성도시들과 잉청저우 섬 남단과 바시 제도에 속하는 남부의 농림어촌 지역이라는 소지역주의 냄새가 풀풀 풀기는 양 소지역을 하나로 묶어 구성된, 이른바 존재감이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징후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잉청현 현지사에 출마하기로 결정, 치열하게 선거전을 펼쳤다.

가장 먼저 안징후이의 귀환을 반긴 장이 시부터 시작하여, 신잉청현 북부 일대에서는 유세마다 안징후이를 반기는 많은 인파들로 북적였다. 그러면서 신잉청현 남부도 포용하기 위해 공약에 신경을 많이 쓴 안징후이는 결국 신잉청현 현지사 선거에서 4강 후보 상황 속에서도 43.8%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 이후 신잉청현 현지사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림어촌 촌락 지역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농림어업 각 협동조합, 6차산업 등을 최소한의 지원선에서 장려했으며, 산간지역의 왕래를 위한 민자도로 및 해안평지 지역의 왕래를 가까이 하기 위한 사설철도 등을 허용하려고 노력했으나, 신잉청현에서도 잉청저우 섬 남부의 현민들이 "협동조합과 6차산업은 받아들여도 민자도로와 사설철도는 결사 반대한다"라고 연좌까지 하며 강력한 반발을 하자, 산간지역의 왕래를 위한 민자도로 및 해안평지 지역의 왕래를 가까이 하기 위한 사설철도 등을 허용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손 놓지 않은 안징후이는 이 당시도 개발이 덜 된 장이 시의 옛 시낭 시 지역과 저우제 시 남부 지역과 세이란 시 북부 지역, 스기 시 서부 지역, 잉청구팅 시 북부 지역, 우샨 시 북부 지역의 개발과 동시에 신잉청현 현청을 독일령 잉청저우 섬 시절부터 사용한 거랴오 시의 구 현청에서 현재의 시왕 시 자리의 신 현청으로 이전하였으며, 남부의 농림어업 기계화를 장려하기 위한 기업들과의 할인 연계 하의 기계농업 세미나를 자주 개최하기도 하였다. 기후 상 가능한 벼의 이기작(二期作)[4]을 기계농업의 보급 장려와 비슷하게 종묘기업들과의 할인 연계 하의 세미나를 열어서 장려하기도 했다. 그 결과 기계농업 보급률은 취임 당시 5.3%에서 21.4%까지 늘어나고, 이기작(二期作) 보급률은 30.9%에서 99.8%까지 급속도로 늘어나는 등의 성과를 거두고, 그로서 남부 농림어업지대의 평균 GRDP를 북부의 2/3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뜻하지 않게도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쌀 생산을 취임 당시 1830만석에서 퇴임 당시 2900만석까지 늘리는 성과를 거두었다.[5][6]

그러면서 2015년 돌연 안징후이 돌풍이 불어닥치며, 정계에서는 조만간 2016년 대선에서 자유당에서 경선 들어가는 거 아니냐고 했을 정도로 돌풍이 심각했다. [7] 결국 신잉청현 현장 재선을 포기하고 돌연 총통선거 출마를 결정, 결국 자유당 경선에서 72.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럼에도 성향 상 민주당과의 공통성이 많을 수밖에 없던 안징후이는 조건으로 기존 정치 진영의 재편과 동의어 그 자체이던 국민당과의 정책/선거 연대의 파기 및 민주당과의 정책/선거 연대 수립을 요청, 결국 안징후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던 자유당 당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자유당 지도부는 결국 안징후이의 조건을 수용했다. 물론 국민당은 반발했지만, 안징후이 돌풍, 소위 안류(安流)에 의해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부총통에 민주당 미자와 요시헤이 전 국민대회 의원을 지명하며 러닝메이트를 완성하며, 이미 힘을 크게 받은 안류는 빠르게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정계를 흔들게 되었고, 처음 16대 연방총통 선거에서 비록 연방국민대회, 연방입법원, 연방전국지방선거에서 승리를 주도했음에도, 국민당의 승리 혹은 진보당의 재집권을 예상했던 것과 달리, 결국 총통 선거에서 50.1%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반전을 보여주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연방총통이 되었다.

총통 초선 이후[edit | edit source]

취임 이후 - 불황 타개 작전[edit | edit source]

때마침 안징후이가 총통에 취임하던 2016년 12월은 7달 전 이웃나라 중화민국 총통으로 취임한 차이잉원의 행보로 인해 화북 2국과 중화민국의 외교관계가 경색되어가던 때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제는 불황으로 인해 성장 동력을 상실하며, 경착륙이 우려될 정도의 대불황이 불어닥쳤다. 심지어 급진적으로 도입된 전체적인 무상복지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제에 더더욱 급격하고 치명적인 역풍을 끼쳤다.

이에 안징후이는 연방총통 취임 직후부터 긴급명령을 통해, 헌법과 법률에 제한된 선 안에서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줄이되, 최소한의 개입선을 통해 잉청저우 시를 중심으로 한 잉청저우 도시권의 업종 다양화를 통한 산업 첨단화와 이스트코스트의 소비기능을 세계화와 더불어 생산직 서비스업으로의 강화 등을 통한 생산기능으로의 전환, 그리고 전 연방 농림어업의 기계화를 지원하기로 결정, 이를 전 연방 차원에서 연방정부 단위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와 동시에 전 분야에 도입된 무상복지를 무상급식(의무급식) 등의 부분적으로, 일부 필요한 부문을 제외하고는 전 연방에서 폐지하면서 단계적 재도입 로드맵을 발표하여 그것을 토대로 재도입을 실시하기로 하였고, 전연방민건강보험과 전연방연금의 보장성을 강화하고, 기존에 세금으로만 운영되던 전연방민건강보험과 전연방연금을 오로지 자체 제정으로만 운영하고, 이를 위해 단계별로 보험료와 연금료를 걷으면서, 단계별로 세금 지원을 중단시켰으며[8], 경제적 악화나 경제 분배에서의 국가 개입의 필요성이 생길 경우,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선에 따라, 각 직할시/현의 정부에 정책의 실시를 맡기도록 했다.

그와 동시에, 제4차 산업 혁명의 핵심으로 지목된 인공지능과 첨단 로봇, 자율주행차 등의 산업을 도입하는 방안을 2017년부터 논의하였으나, 인공지능과 첨단 로봇을 도입하면 설 자리를 완전히 잃을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하층민 막노동자 계층이 반발하고 나섰으며, 추가로 자율주행차의 도입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사설철도 업계와 잉청저우 직할시/이스트코스트 직할시의 시내버스 업계, 심지어는 택시 업계까지 자율주행차의 도입에 대거 반발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안징후이는 노력하였으며, 이에 따라 2019년 1월에 사회적 대타협, 소위 따뜻한 겨울의 대타협[9]이란 결실로 그 결과물이 도출, 이에 따라 택시업계, 사설철도 업계, 시내버스 업계의 이익을 최대한 보전하면서도, 연방입법원 및 국민대회의 자유당 의원들과 합을 맞추며, 당정 간의 공조 하에 네거티브 규제의 패러다임을 포지티브 규제로 바꿔나가는 온건개혁적인 정책과 입법을 실시하여 신산업의 도입을 앞당기는 데 일조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효과로 인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2018년에 불황 이전의 경제성장률의 70%까지 경제 성장을 견인했으며,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경제성장률이 불황 이전으로 복귀하는 등, 불황 타개 작전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동아시아 연합의 결성[edit | edit source]

이후 화북 2국과 중화민국 간의 중재에 성공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과 안징후이 연방정부(샬로-팔나-안다리 연방행정원(혹은 내각))의 범동아시아 단일시장/단일정치체 구축 정책이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고, 수십년 동안 진전과 후퇴를 반복했으나, 2016년 안징후이의 연방총통 취임 이래로 대한민국과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주도를 통해 급속도로 진전된 논의가 결실을 맺은 결과로, 2019년 후신국, 후순국, 잉청저우 제도 연방, 대한민국, 류큐공화국, 중화민국, 일본민국, 사할린국, 학구도 공화국, 만주 공화국, 아무르 공화국을 가입국으로 하는 동아시아 연합을 출범시키는 과정에서 중재국 겸 주도국 역할을 하는데에 힘썼으며, 상위 5대 국가[10]로써 동아시아 연합을 주도하는 데에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코로나19 대처[edit | edit source]

그와 동시에 2019년 10월부터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에서는 2019년 11월에 연정 상대인 민주당이 제시하고 연정 간의 수차례의 토론을 통해 2019년 12월에 연방입법원에서 연정 양당(자유당, 민주당)이 입법활동을 하면서까지 승인한 한국식 해법을 사용하면서, 2020년 1월 초까지 준비를 마치고, 2020년 1월 17일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래로, 최대한 많은 감염자를 찾아내어 최대한 빠른 격리 치료를 제공하였고, 2차 대유행을 대비해서 현재 검사 역량 및 확보 격리병상을 확대할 수 있도록 각 시/현/특별구 정부와 연방 입법기관 및 지역 입법부 등을 통해 논의, 결국 최대의 검사 역량 및 격리병상을 확보하여, 방역에서 우세한 성과를 보였다. 1차 대유행은 4월에 진정되었으며, 10월 2차 대유행 시작 이전까지 한동안 일일 확진자수가 20명 이하를 웃돌은 상태에서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2020년 10월에 발생한 잉청저우의 코로나19 2차 대유행에 대한 대처도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시스템이 이에 발맞춰 잘 작동한 결과로서 2021년 1월까지 코로나19 3차 대유행을 해소하고, 타 국가와 비슷한 백신 수급 지연 속에서도 2021년 3월 10일부터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해 전 연방민의 40% 가량을 접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안징후이의 총통 지지율은 50%대 콘크리트를 기록, 연방총통선거 재선에 도움이 되었다.

현재 코로나19 종합 상황에서 일평균 검사자수 16만 6천 5백명(누적 검사자 수 839만 3천 4백명)에 총 확진자수 59,028명[11]으로서, 현재 그 중에서 완치자 58,210명, 사망자 88명, 치료 중 730명에 놓여져 있다.

총통 재선 : 시작, 잉청저우 2050[edit | edit source]

2020년 총통선거에서 52.8%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안징후이는 2020년 11월 12일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제, 사회, 문화, 기술 등의 전반에 대한 국가 발전 계획으로써 잉청저우 2050이라는 모델 및 계획/목표 등을 내놓았다.

이러한 잉청저우 2050 계획에 따라 이미 발전된 고층농장 기술을 비롯한 선도적인 산업의 융합 가능 기술의 첨단화 및 이를 통한 시설 경량화를 가지고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등의 접목과 융합을 중시하는 연구개발 투자에 어느 정도 집중하는 등의 시그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물류에서 리우허핑 등의 철도파 정치인 및 도로교통파 정치인에 의해 연방의 모든 섬이 육로로 연결되는 물류혁명을 통해 외국과 육로로 이어지는 것이, 평시에는 최고의 물류를 자랑하나, 전시에는 이것이 오히려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목줄을 죌 수 있음을 알고, 이에 대한 보완책을 연방행정원 등과 논의해서 만들기 시작했으며, 2022년 신년사 직후 이러한 계획은 잉청저우 제도 연방 항구 및 해운 육성정책 비전 2070으로 2070년까지 해운업 활성화 수준을 1970년대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공식 발표 및 추진 단계에 들어갔다.

어록[edit | edit source]

이제 우리는 식량위기에서 영구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신잉청현 지사 재임 시절인 2015년 농민기념일에 신잉청현 일원의 일직이수작 보급과 농업의 기계화를 통한 잉청저우 제도 연방 식량자급률 30%을 수호한 것을 기리며

유럽은 일찍이 다양성 속에서 하나가 되어 나아가면서 민족을 뛰어넘는 통합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이러한 길을 밟아볼 차례입니다.

동아시아 연합 결성조약 체결 이후 ARY에서 메인 뉴스 프로그램의 하카어(客家語) 에디션에서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보면, 첨단 산업이 나라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자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는 한국의 2010년대 초반 모습과 같은, 이제 막 뿌리내리기 시작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2019년 이낙연 신임 대한민국 대통령을 향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첨단산업 실정을 이야기하며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 기본소득은 곧 자살행위입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첨단 산업을 비롯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산업이나 우리가 강하게 밀고 나가는 산업을 지속적으로 키우면서 모두가 존중받는 나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2020년 총통선거에서 장 드 펠릭스의 대선 공약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여담[edit | edit source]

  • 자신이 모어로써 사용하는 월어, 표준한어 외에도 하카어(客家語), 필리핀어, 류큐어, 대만민난어 등을 유창히 할 수 있다고 한다. 오어와 일본어는 배운 적은 있음에도 알아듣는 것 이외에는 잘 못한다고 한다.[12]
  • 잉청저우식 작장면을 매우 잘 먹는다고 한다.
  • 장 드 펠릭스와는 악연이다.

선거 기록[edit | edit source]

잉청저우 제도 연방 선거 제도의 수혜자.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연방입법원의 지역구 연방입법위원은 1개 선거구에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선출되는데, 이러한 제도의 수혜를 받아 연방입법위원 선거에서 나가기만 하면 당선되었다. 이 때문에 선거에 6번 출마했는데, 6번 모두 당선되었다.

  • 잉청저우 제도 연방은 대수를 기준으로 선거를 기산한다.
선거년도 선거명 직책명 선거구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1992 제10대 지방선거 시장 신잉청현 장이시 통합 3대 자유당 46.8% 119,020표 1위 당선 Yes check.svg
1996 제11대 연방입법위원 선거 지역구 신잉청현 장이시 둥위안장이 11대 자유당 47.9% 88,530표 2위 당선 Yes check.svg
2000 제12대 연방입법위원 선거 지역구 신잉청현 장이시 둥위안장이 12대 자유당 50.8% 105,540표 1위 당선 Yes check.svg
2004 제13대 연방입법위원 선거 지역구 신잉청현 장이시 둥위안장이 13대 자유당 49.2% 116,146표 2위 당선 Yes check.svg
2012 제15대 지방선거 현지사 신잉청현 15대 자유당 43.8% 2,115,751표 1위 당선 Yes check.svg
2016 2016년 총통 선거 연방총통 잉청저우 제도 연방 전국 16대 자유당 50.1% 9,759,025표 1위 당선 Yes check.svg
2020 2020년 총통 선거 연방총통 잉청저우 제도 연방 전국 17대 자유당 52.8% 1위 당선 Yes check.svg

각주[edit | edit source]

  1. 1992년에서 2020년까지의 통합 장이 시로 치자면, 본래 장이 시를 구성하던 지역인 위안장이(한자로 옮기면 元姜宜) 출생이다. 이때의 통합 장이 시는 위안장이(元姜宜)와 남계토(南界土, 난제투)라 불리는 옛 시낭 시 지역을 합쳐서 이루어진 일종의 도시 연합체 행정구역에 가까웠다.
  2.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한 때(사실상 1945년 10월의 국민당 접수 때)부터 1956년까지는 중화민국 타이완성 잉청저우 현에 속했다보니, 잉청저우에도 외성인이 상당수 남아있으며,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한족 외성인은 중화민국 타이완성의 외성인과는 달리 주로 푸젠 성 출신보다는 장쑤/저장/산둥/광둥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 이들에 의해 이들의 말인 오어나 광둥어, 그리고 표준중국어의 전신격인 관화의 방언인 산둥 관화가 잉청저우 섬 일대에 이식되었다. 중화민국 타이완성의 외성인은 절반이 국공내전이 끝나고 양쯔강을 끼고 있는 성의 최북방경계가 휴전선으로 확정된 채 휴전하면서 자신들이 살던 도시나 고향으로 귀환했으며, 나머지 반은 잔류하여 현재의 타이완 외성인이 형성되었으나, 잉청저우에서는 그 당시 뜨거운 독립 열기와 그에 대한 반대로 인해 외성인이 최대한 끝까지 버틸려고 했던지라, 귀환 기회를 놓쳤으며, 결국 잉청저우 섬이 독립하여 이제 막 독립한 이스트코스트 속령과 합쳐 잉청저우 제도 연방을 발족시키면서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잉청저우 섬에 눌러 앉으며 현재의 잉청저우 외성인이 형성되어 둘 간의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3. 이게 왜 중요한고 하니, 안징후이가 국립 잉청저우 대학에서 박사 과정까지 졸업한 2000년대 중반까지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정치인과 지식인 등의 엘리트 계층은 소속 정당이나 재임 대학 등을 가리지 않고 국내 대학보다는 프랑스의 대학들이나 그랑제콜, 독일의 국공립대, 일본의 소케이죠리, 미국 내 대학순위 상위권 대학, 못해도 한국의 서연고, 정 안되면 중화민국의 국립대만대학, 국립푸저우대학, 국립광저우대학, 홍콩대학, 홍콩중문대학, 정따(政大, 국립정치대학), 국립칭화대학, 둥우대학, 국립자오퉁대학 정도의 대학교를 나온 이들이 절대 다수였다. 다행히도, 안징후이가 대학 학력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이 현상이 해소되어, 지금은 훨씬 덜한 편이라고.
  4. 다른 말로는 일식이수작(一植二收作)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한 작물을 한 해에 두번 농사짓는다는 것이다. 보통 온난 습윤 기후/온대 하우 기후 등에서도 겨울철 기온이 낮지 않아서 아열대기후로 따로 분류되는 곳에서도 최소 북위/남위 30도~최대 북위/남위 35도 이하/이상 지역과 열대기후 지역만 이것이 가능하다. 현실 한국에서도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를 반영하여 이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지만, 현재까지 그것이 완벽하게 성공한 적은 없다.
  5. 이기작은 안징후이가 신잉청현 현장을 역임하기 전까지 바시 제도 일대에만 보급되어 있었고, 잉청저우 섬 남부에서 잉청저우인(잉청저우 원주민)과 잉청저우 내성인들은 쌀농사를 한번만 지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잉청저우 내성인의 뿌리인 화남지역의 한족, 잉청저우 원주민과 필리핀인의 문화의 차이로 보인다. 1980년대 이래로 북부 위성도시들에다가 이미 그 시절부터 잉청저우 제도 연방에서 기술을 선도하던 고층농장 기술을 적극 활용해, 고층농장으로 이뤄진 농업단지를 몇개 만들어서 식량생산기능을 수용하고, 부족한 식량을 최대한 충당했지만, 그럼에도 수입 의존도는 높을 수밖에 없어 식량 자급률은 20~30%를 오갔고, 그러한 고층농장 대책으로의 식량생산 증식에 대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이다.
  6. 안징후이 재직 4년간의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쌀 생산 증가량의 평균 80% 이상이 신잉청현 일대에서 기록된 것인만큼, 남북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기계화 및 일식이수작(一植二收作)의 보급에 대한 안징후이의 성과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안징후이가 신잉청현 지사에 취임했던 2012년 이후로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식량자급률이 더 이상 30% 밑으로 내려가지 않게 되었다고 하니 말 다한 셈이다.
  7. 사실 이는 당시 연방총통이던 진보당 소속 장 드 펠릭스 연방총통의 실정 때문인데, 이 실정이라는 것이 강력한 사회보장성 강화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해당 정책에 반발할 수밖에 없던 것이,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세율을 급격히 올리면서, 사회보장성을 강화한답시고 국가 건강보험이나 국가 연금의 보장성 강화 등의 정책이 아닌, 무조건적이고, 전체적인 무상복지를 연방 단위로 대거 도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안징후이 연방정부 취임 이후 공개된 국가 기록에 의하면, 세계 추세는 일하는 복지, 공공일자리 등으로 가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일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시대임에도 말이다. 사실 세율을 급격히 올려서 무리하는 일 없이, 한국과 같이 무상급식(의무급식) 등에서와 같이 부분적으로 필요한 부문에 무상복지를 도입했으면 수요층의 반발이 없었을 것이다.
  8. 이것을 처음 시행한 2017년 6월에는 걷어야 할 요금의 20%를 걷고, 세금 지원은 80%만 해주었으며, 6개월마다 20%씩 비율을 조정하면서 2019년 6월에 이를 완수했다.
  9.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영토 중에서 잉청저우 시와 신잉청현 북부 위성도시들, 이스트코스트는 아열대기후에 속하고, 그 외 지역이 열대기후에 속하는 점으로 인해 겨울이 따뜻한 수준을 넘어서 덥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애초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우엔 위도 상으로 전 국토가 북위 30도 이하에 속한다.
  10. 중화민국, 대한민국, 일본민국, 잉청저우 제도 연방, 만주 공화국
  11. 잉청저우 시 23,256명, 이스트코스트 시 11,628명, 신잉청현 17,442명, 동도현 2,907명, 해청위 연방특별구 1,744명, 검역 2,052명
  12. 이럴 수 있는 데에는 한자의 힘이 크다. 한자문화권에서는 한자와 이를 기반으로 한 고대 서면언어인 한문을 가지고 필담으로 해결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게 빈번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