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연방공화국

From 더 스토리즈 대피소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South Korea road sign 135.svg 주의. 이 문서는 현재 공사 중입니다.
이 문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본문에 표현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하거나, 본문의 개연성이 낮아 해당 문서 및 그 관련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민주의 여명 세계관 틀.png 이 문서는 민주의 여명 세계관을 구성하는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대체역사 장르의 세계관인 민주의 여명 세계관을 구성하는 문서로써, 모든 것은 허구의 설정이나, 세계관 설정의 구성을 위해 일부 현실의 것을 변형 혹은 확대한 설정이 있을 수 있으며, 이 문서의 기여 및 그 철회에 대한 권한은 민주의 여명 세계관을 연재하는 미르체아 지우르지우에게 있습니다.
공식 설정.png 주의. 이 문서에서 다루는 내용은 각 세계관이나 각 단일 설정에서 채용한 공식 설정입니다.
이 문서는 각 세계관 혹은 각 단일 설정을 창작하는 창작자가 작성한 작성한 공식 설정이므로, 각 세계관 혹은 각 단일 설정의 창작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단순 오류나 오타를 고치는 것 이외의 편집을 시도하는 행위는 반달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수정 가능 여부를 문서 작성자에게 문의하여 주십시오.
발트연방공화국
7개 언어
에스토니아어: Liitvabariik Balt
라트비아어: Baltijas Federatīvā Republika
리투아니아어: Baltijos Federacinė Respublika
고대 프로이센어: Baltiskai Federuciva Republīka
독일어: Föderative Republik Balt
폴란드어: Federacyjna Republika Bałtyku
러시아어: Федеральная республика Балтия
발트연방공화국 국기.png 발트연방공화국 국장.png
국기 국장
국가 발트연방공화국 국가
국가 위치
수도 탈린, 리가, 빌뉴스, 쿤네그스가브스
최대 도시 리가
정치
연방대통령 엔드릭스 메멜리
연방국무총리 크리샤니스 아르퉈
역사
정부수립  
 • 발트 대봉기 및 발트 공화국 설립 1793년 4월 22일
 •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독립 확인. 1918년 11월 11일
 • 발트연방공화국 수립으로 인한 연방제 전환 1945년 7월 22일
지리
면적 192,996.1 km2 ()
시간대 EET (UTC+2)
DST EEST(UTC+3)
인문
공용어 에스토니아어, 라트비아어, 리투아니아어, 고대 프로이센어(프레골라어)
지역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독일어
인구
2020년 어림 11,754,290명
인구 밀도 60.9명/km2
경제
 • 전체 42,895$
HDI 0.862 (2020) 2020년 조사)
기타
ISO 3166-1 BF, BFR
도메인 .bf

발트연방공화국(고대 프로이센어: Baltiskai Federuciva Republīka 발티스카이 페데루치바 레푸블리카, 라트비아어: Baltijas Federatīvā Republika 발티야스 페데라티바 레푸블리카 , 리투아니아어: Baltijos Federacinė Respublika 발티요스 페데라시네 레스푸블리카 , 에스토니아어: Liitvabariik Balt 리트바바리크 봘트 , 러시아어: Федеральная республика Балтия 피데랄리야 레스푸블리카 발티야, 독일어: Föderative Republik Balt 푀더래티브 레푸블릭 발트, 폴란드어: Federacyjna Republika Bałtyku 페데라치냐 레부블리카 봐티쿠, 영어: Federation Republic of Balt 페더레이션 리퍼블릭 오브 벨트)은 북동유럽의 발트 제 지역을 영토로 하는 국가이다.

지리[edit | edit source]

신생대 제 4기 중 빙하기에 빙하에 덮여 있던 여파(빙하 침식 등) 및 해빙기 시의 해수면 상승의 여파로 에슈티 지역은 리아스식 해안이 나타나며 라트비야 지방과 리에투바 지방은 저지대 아니면 구릉으로 뒤덮여 있다. 프레이가라 지방은 전부 저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심지어 에슈티 지방의 경우에는 러시아 공화연방과 접경한 동쪽 경계에 페이푸스 호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발트해/남쪽으로는 핀란드 만을 끼고 있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빙하의 영향에 의해 평균 해발고도가 50m에 불과하고 가장 높은 지대라고 해도 318m에 지나지 않으며, 이로 인해 부존된 유혈암(오일셰일)과 석회석, 심지어 라트비야 지방에서도 에슈티 지방과 함께 지형 조성에서 상당한 빙하의 영향을 받아, 발트연방공화국의 전체 국토의 17%에 해당하는 삼림이 에슈티 지방 경제의 부수적 원동력, 라트비야 지방 경제의 주 원동력이 되고 있을 정도로 자원이 의외로 부존되어 있다.

아무튼, 핀란드(수오미)와 함께 빙하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지역이다 보니, 에슈티 지방에는 1,400여 개나 되는 작고 큰 호수가 있으며, 대부분은 면적이 작은 호수들이고, 가장 큰 호수는 3,555km²에 이르는 페이푸스 호(Lake Peipus)이다. 결국엔 이로 인한 강 줄기도 많아서 162km의 지류인 보한두 강(Võhandu), 파르누 강(Pärnu) 등이 있다. 리에투바 지방과 프레이가라 지방도 에스토니아 지방에 견줄 만큼 강줄기가 많으며, 이는 클라이페다 강, 프레이가라 강 등의 큰 강으로 흘러들며, 특히 클라이페다 강은 프레이가라 지방과 리에투바 지방의 북남서부 경계의 일정 부분을 이루고 있다.

에슈티 지방에 속하는 발트해 연안의 도서 지역은 말 그대로 에슈티 지방의 서해안과 북부 해안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들 도서를 추산한 결과는 1,500여 개 이상의 도서가 밀집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들 중 가장 큰 두 섬은 사레마(Saaremaa) 섬과 히우마(Hiiumaa) 섬이다.[1]

역사[edit | edit source]

시작된 역사, 기록이 부족한 수많은 민족의 요람[edit | edit source]

발트연방공화국의 영토에 해당하는 곳은 본래 핀-우그로 계열의 에슈티인(에스토니아인)과 스칼비아인, 갈린디아인, 수도비아인, 리투아니아인, 세미갈리아인, 셀로니아인, 쿠로니아인, 라트갈레인 등의 동발트 계열 제민족, 서발트 계열의 프레골라인(프루사인)이 자리를 잡았다. 본래 발트인들은 오늘날 동유럽 전역에 거주하던 민족이었으나 서기 5세기 무렵부터 발트해 연안 늪지대 외 동유럽 전역에서 슬라브인들에 흡수,동화되면서 거주지가 축소되어 발트해 연안에만 살게 되었다. 오늘날 독일어에서 프레골라인을 달리 일컫는 일컫는 프로이센, 프레골라어에서 프레골라인 자신들을 달리 일컫는, 전자에 배치되는 프루사라는 단어가 유래한 어근을 봐도 이는 확실하게 증명된다. 이들 민족들은 발트 신화나 핀-우그로 토속 신앙의 일부인 에슈티 토속 신앙을 믿었었다. 이는 곧 기독교로의 개종이 늦어지는 것을 필연적으로 부른단 것인데, 그 이유를 간략히 말하자면, 민족 대이동의 와중에도 본래 살던 곳을 떠나서 다른 땅에 정착할 필요성을 못 느껴 현재의 발트연방공화국 일대에 그대로 눌러앉았고, 그로 인해 기독교를 믿을 필요성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남은 기록은 고대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이 오늘날의 에스토니아 지방에 해당하는 지역의 작은 부족 국가들이 호박을 수출하며 번영을 누렸다가, 철제 무기로 무장한 게르만족 전사들에게 나무 몽둥이만 들고 싸우다가 패배 후 정복당했다는 짤막한 기록과 리투아니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1009년의 라틴어로 적힌 퀘딘부르크 연대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 등의 단편적인 기록들 뿐이었다.

북부 에스토니아로 들어오는 덴마크 세력[edit | edit source]

덴마크는 1217년, 에스토니아 북부의 이교도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십자군 거병을 결정했다. 그러고서는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219년 북부 에스토니아의 발트해 해안가 곳곳으로 침략해오며, 탈린 등의 도시를 세우며 북부 에스토니아에 자신들의 봉신국인 에스토니아 공국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1219년 6월 15일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 국왕이 에스토니아 원정 도중에 린다니세(Lindanise, 현재의 발트연방공화국 탈린 시) 전투에서 고전을 겪고 있을 때 하늘에서 하얀색 십자가가 그려진 붉은색 깃발이 등장하면서 덴마크 군대가 승리했다는, 덴마크 국기 단네브로(덴마크어: Dannebrog)의 제정에 관한 전설이 만들어졌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러면서 에스토니아인(당시 추디-에스티인)은 기독교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으며, 에스토니아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라틴어나 교회 슬라브어는 커녕 당시 초기 러시아어나 중세 고지 독일어도 제대로 읽고 쓸 수 없었다. 심지어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기 이전까지는 에스토니아어로 번역된 성경도 없었다. 결국 중세 에스토니아인들은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기독교도로의 변화는 표면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그동안 보전해왔던 토속신앙인 핀-우그로 신화에서 비롯된 의식이나 관습은 이중 신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덴마크의 봉신국인 에스토니아 공국은 에스토니아인의 저항에, 리보니아 기사단의 배신 및 수차례의 기습공격에 바람 잘 날이 없을 정도로 혼란했고, 결국 1346년에 때마침 리보니아 기사단을 흡수한 튜튼 기사단에 돈을 주고 에스토니아 공국을 팔아 버렸다.

리보니아 기사단의 정복[edit | edit source]

본래 라트비아 지방의 발트인들은 폴로츠크 공국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당시 라트비아 지방의 여러 동발트 부족들은 기독교 대신 전통 발트 신화를 믿고 있었다. 리투아니아 지방과 라트비아 지방에서는 주로 최고신으로 고대 슬라브 신화의 페룬에 해당하는 페르쿠나스(Perkūnas)를 숭배하였다.[2] 결국 12세기 후반에 독일인 선교사들과 이들을 따라온 소수 독일인이 이들 발트인들을 개종하기 위해 리가만 연안에 진출하여, 이를 교두보로 하여 발트해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처음 개종을 시도하던 이들은 세미갈리아인의 공격에 시달리던 리보니아인으로, 1189년 독일인 선교사들은 리보니아인 추장들을 개종시킨 것으로 시작해서, 리보니아인 영토에 독일인 거주지를 세우는 것으로 발트인과 공존하며 그들이 기독교를 믿도록 하였다. 하지만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리보니아인 추장이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발트인과 공존하면서 진행되는 선교가 천천히 진행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이로서 자신들의 정복욕을 불태우면서 명분으로 앞서 언급한 이유로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 선교 성과의 저하라는 핑계를 걸어 하노버의 베르톨드가 이끄는 소수의 북방 십자군이 1198년 리보니아의 독일인 거주지로 파견되었으나, 해당 십자군은 얼마 안되 개종하지 않던 일부 리보니아인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그러자 건수를 잡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리보니아의 십자군을 증원할 것을 명령, 그 길로 1199년 알브레히트 주교가 이끄는 북방 십자군이 리보니아에 들어와, 기존 기사단을 이어받아 정복욕을 불태우며 라트비아 지방 일대를 정복하였다. 당연히 알브레히트 주교가 이끄는 독일인들은 1201년 리가 주교구를 세웠고, 1202년 리보니아 기사단을 창설하였다. 또 당연히 리보니아 기사단의 임무는 상당수 발트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남아있던, 리보니아 연안의 다신교를 믿는 미개종 발트인들에게 기독교(카톨릭)를 전파함과 동시에, 이 지역에 정착한 독일인들과 이 지역으로 들어와 무역하는 독일인 상인들/상단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당시 중세 봉건구조에 맞는 지배를 통한 수탈과, 이를 통한 독일 도시들과의 해상 무역 증진에 있었다. 때마침 1227년, 이들 기사단은 에스토니아 남부로 진출하여 정복, 에스토니아 남부를 자신들의 봉토로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에스토니아 대공국에 쳐들어갔다. 라트비아 지방의 서부와 에스토니아 지방의 남부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이 정복을 시도해서 성공한 것이다.

결국, 라트비아 지역의 발트인 부족들과 에스토니아의 여러 핀-우그로 계열 부족들, 그리고 폴로츠크 공국이 힘을 합쳐 리보니아를 탈환하려 시도했지만,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거점마다 견고한 석조 요새들을 건설했던 것 때문에, 공성전이라고는 나무 성벽을 불지르는 것 밖에 못해본 라트비아인들은 공성 무기가 없었으므로 결국 이러한 요새들을 탈환할 수 없었고, 이는 향후 300년동안 독일인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라트비아의 동부 지역의 라트갈레인들이 검의 형제 기사단의 동맹이 되어 석조 요새들을 건설하는 것을 도와줬으나, 리보니아 기사단은 이런 협조를 통해 기독교 선교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은혜를 배은망덕하게도 라트갈레인 부족이 세웠던 예르시카 공국의 공후의 어린 부인을 납치해서 인질로 삼고 라트갈레 부족이 리보니아 기사단에 무릎꿇을 것을 강요했던 것으로 되갚아 왔다. 결국 힘의 차이에 의해 예르시카 공국은 리보니아 기사단에 굴복해 봉신국이 되었고, 공후의 어린 부인은 예르시카 공국으로 돌아왔다. 한편 이런 식으로 예르시카 공국을 봉신국으로 삼은 성과로 말미암아, 리가의 알브레히트 주교는 몇년 안가 리가 대주교로 승격, 결국 리가는 도시로서의 자격을 갖추면서 대주교구를 갖춘 도시 겸 리보니아 지역의 중심 도시로 올라서게 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발흥[edit | edit source]

앞서 언급한 대로, 리투아니아 지방에 자리한 리투아니아인, 수보비아인 등의 동 발트계 민족들은 고대부터 중세 초까지 발트해 연안 일대 늪지대에 고립되어 살았으며, 이는 민족 이동의 필요성을 저하시켜, 발트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그들의 고유 신앙인 발트 신앙을 지속적으로 믿도록 하였다. 즉, 리투아니아 지방과 라트비아 지방에서는 주로 최고신으로 고대 슬라브 신화의 페룬에 해당하는 페르쿠나스(Perkūnas)를 숭배하였다.[2] 심지어 이 페르쿠나스 숭배 신앙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13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말 다한 셈이다.

그래서 이를 핑계로 발트계 민족을 정복하려고 마침 십자군 전쟁으로 십자군 바람이 부는 와중에 조직된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기사단 등이 발트해 연안 일대 늪지대로 침략해 들어오는 등의 일이 일어나며, 결국 쿤네그스가브스 일대의 프루스인이 정복당하면서 프루사인(프레골라인)이 대놓고 동쪽으로 대이동하거나 튜튼 기사단에 살육당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에 대한 악영향이 리투아니아 지방에까지 불어 닥치며 리투아니아인의 민족 정체성이 생성되고 모든 부족이 단결하였으며, 이로서 단일 국가를 조직하려는 일련의 행동이 추진을 받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리투아니아 일대 발트인 부족들은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기사단 등이 쓰던 선진적인 무기, 군사 체계 등을 적극 수용하면서 무척이나 경계하며 스스로를 지켰으며, 이는 튜튼 기사단이 리보니아 기사단과 함께 북방 십자군의 최전방에 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달하여 갖춘 유럽 최신의 무기와 갑주, 성채 건축술도 늪지대가 많은 리투아니아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니 하나도 안 먹히고 곤란을 겪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결국 1235년 민다우가스에 의해 당시 흑루테니아라고 불리던 지역의 도시 나바흐루닥이 정복된 상황에서, 그 다음해인 1236년에 완전히 부족 통일이 되었으며, 1253년 7월 6일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그 후 리투아니아 군주들은 결혼 동맹을 빌미로 상속을 주장하는 한편 가톨릭이나 정교회로 개종하는 척 하면서 타타르인들이나 튜튼 기사단을 기습공격하길 즐겼다. 그러면서 13세기 후반, 악명높은 몽골 제국의 군대의 정복활동은 유럽에까지 다다랐고, 그 결과로 헝가리와 폴란드가 털리고, 키이우 공국이 대놓고 평야지대의 단점을 보여주며 몽골 제국 군대의 침략으로 멸망한 것을 본 리투아니아인들은 타타르인을 기습공격하던 그 기세로 과거 키이우 공국의 광대한 영토에서 몽골 제국의 여러 칸국에 해당하는 영역(타타르의 멍에가 일어난 지역)으로 재빠르게 확장하여 타타르인들을 축출하고 루테니아인을 수용하며 오늘날의 벨라루스 일대와 우크라이나 일대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튜튼기사단에서는 리투아니아인들의 급격한 영토 확장과 유희적 배신에 위협을 느끼고 여러차례 십자군을 보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침략하기를 멈추질 않았으나, 프레이가라인의 대이동으로 인해 프레이가라 공국이 설립되면서 튜튼 기사단은 메멜 강 이북으로의 영지 확장, 결과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대한 침략에 실패하였다.

프레이가라인 수난기[edit | edit source]

프레이가라인은 본래 프루사인으로 불리었으며, 오늘날의 프레이가라 지역의 주요 민족이다. 이들은 서 발트계 부족 중 하나였으나, 오늘날의 프레이가라 일대를 비롯한 폴란드 북동부까지 그 세력이 뻗었었고, 이를 독일인들이 정복하며 프로이센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들 민족/부족도 결국 발트계였다고, 발트 신화를 믿고 있었다. 그 와중에 1206년, 시토 수도회의 '올리바의 크리스티안'이 선교 활동을 벌여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으며, 기독교를 믿는 프루사인이 출현했다. 그러면서, 1215년에 올리바의 크리스티안은 신생 프로이센 주교구의 초대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일부 개종하지 않고 발트 신화를 믿던 원주민의 대대적인 적대행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때 쯤 조직된 리보니아 기사단은 수도 없이 많은 잔학 행위를 실시, 그에 분노한 개종하지 않고 발트 신화를 믿던 일부 원주민은 폴란드 왕국의 헤움노, 마조비아, 포메라니아 등지를 공격하는 등의 보복을 실시하였으며, 이윽고 1217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십자군 조직을 허락하여, 폴란드 귀족들의 지원을 얻은 십자군을 조직하여 그로 하여금 프로이센인들의 침공을 일시적으로 막아냈으나, 대부분의 십자군이 "이 정도면 일 다 했다" 나 "성지순례합니다 ●█▀█▄"한 후 철수해버리자, 이때를 노린 프루사인들은 헤움노, 마조비아를 또다시 침공하였고, 결국 당시 마조비아 공작은 남쪽의 프워츠크 시까지 도망쳐야 했다.

이러한 사태에 당시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는 튜튼 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결국 토룬 시에 본진을 삼은 튜튼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리미니의 금인칙서'를 받았고, 이를 통해 앞으로 기사단이 정복한 영토를 영지로 하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바로 이행, 이로써 교황과 콘라트 1세의 지지와 약속까지 얻어낸 튜튼 기사단이 1230년부터 본격적인 프루사인 정복을 시작하며 프루사인이 살던 프레이가라 지역(=프로이센)을 자신들의 이익선으로 만드는 겸 기독교화하기 시작하면서 두번의 대봉기로 대표되는 프루사인들의 대규모 저항이 본격화, 결국 튜튼 기사단은 최신 무기와 건축술을 사용하며 정복한 곳에 자신들의 요새를 건립하는 등의 강경책으로 이들 민족은 대규모로 살육당해,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으나 운이 좋게도 민족 지도자가 나와서 민족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그 민족 지도자는 바로 리투아니아어로 헤르쿠스 만타스라고 불리는, 헤르쿠타스 만티시와 프레이가라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훗날 프레이가라 대공이 된 프레이가라 1세(자쿱스 프레이가라)이었으며, 헤르쿠타스 만티시를 따르는 고대 프로이센인은 이주 없는 지속적인 저항을 결의했으며, 프레이가라 1세를 따르는 고대 프로이센인은 대규모 저항을 겸해 동쪽으로 대규모 이주를 행할 것을 결단, 1250년 8월 2일, 서부(현 폴란드 엘블롱크 일대)와 중앙부(쿤네그스가브스 일대)의 프루스인이 자신들을 프레이가라인이라 고치고 틸세제메 등지의 동부로 대규모로 이주하면서 일부는 리투아니아 영토로 이주했으며, 이로서 프레이가라인을 통일하고 전열을 재정비하며, 1258년 틸세제메를 수도로 프레이가라 공국을 세우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사절을 보내 당대 최신 기술을 수용하였다. 그와 동시에, 헤르쿠타스 만티시와 그를 따르던 프레이가라인이 1260년 봉기하여, 1274년까지 중부 프레이가라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봉기에 실패하는 상황으로 바뀌어가자, 1272년에 헤르쿠타스 만티시와 그를 따르는 프레이가라인이 프레이가라 공국으로 망명, 프레이가라 1세는 헤르쿠타스 만티시에게 백작 직위를 내리며, 그에게 기독교로 개종토록 했으며, 그를 따라온 프레이가라인이 정착할 수 있도록 남쪽 변경의 일부를 헤르쿠타스 백작에게 하사했다.

그 사이, 축출당한 리보니아 기사단[edit | edit source]

이후 리보니아 기사단령과 리가 대주교령, 도르파트 대주교령, 외젤-위크 대주교령, 쿠를란트 대주교령이 뭉쳐 생긴 리보니아 연맹에서는 연맹 설립과 동시에 서유럽식 봉건제도가 도입되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지역에 기사단령과 주교령이 세워젔다. 심지어 당시 활발한 무역활동을 실시하던 독일인 상인들이 대거 정착하였으며, 결국 농노가 된 라트비아인들은 일주일에 4~6일은 독일인 영주나 주교의 땅을 경작해야 했으며, 그 외에도 소득의 25% 가까이를 갖가지 명목의 세금으로 뜯겼다. 라트비아인 농노들은 기회만 되면 리가로 도망가려 들었고 도시로 숨어든 라트비아인들은 독일인인 척 또는 유대인인 척 행동하기도 했다. 이렇게 리보니아 기사단은 이런 서유럽식 봉건제도의 불합리함을 이용한 여러가지 야비한 수법과 지나친 원주민 착취로 인해 원성이 높았으며, 이것이 원인이 된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사모기티아인과의 전쟁에서 여러차례 패전했다. 결국 리보니아 기사단은 패전사를 찍기 시작하여, 1236년에는 사모기티아인들과 세미갈리아인들이 사울레(Saule, 현재의 발트연방공화국 사울라이 주 사울라이 시) 전투에서 기사단 마스터와 기사 48명을 포함 3,000여명을 전사시키는 승전을 거두었으며, 1260년에는 쿠로니아인들과 사모기티아인들이 두르베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의 당시 그랜드 마스터였던 기사를 전사하게 만들었다. 1270년에는 세미갈리아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의 연합에 맞선 카루제 전투에서 또 다시 차기 리보니아 기사단 마스터 기사가 또 한 번 더 전사했다. 결국 이는 클라이막스에 이르렀고, 1279년에는 세미갈리아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여 독일인 상인들을 학살했으며 1287년 가로자 전투에서 검의 형제 기사 40여명과 함께 또 다시 차기 리보니아 기사단 마스터가 전사했다.

결국 리보니아 기사단은 계속해서 많은 단원을 잃으면서 1236년 이래로 계속 역대 기사단 마스터가 계속 전투중에 죽어나가기까지 하는 악전고투에 시달려 힘을 상실할 위기에 놓이자,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튜튼 기사단에 합병하자고 타전, 결국 보다 강한 튜튼기사단의 산하로 들어가 여러차례 패전을 딛고 일어서서, 리가를 중심으로 몇몇 리보니아 연맹 소속 해안 도시들이 한자동맹의 주요 참여 도시로 참가해 발트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던 리보니아 기사단은 세미갈리아인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틈을 타서 1290년 세미갈리아 정복을 완료하였으며, 에스토니아 지방 북부 지역을 먹으면서 더욱 강대해졌다. 이게 어느 정도로 잔악했느냐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어느 연대기에 적힌 역사 기록에서는 약 10만여명의 난민들이 독일인들의 농노가 되는 것을 피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피난을 갔을 정도라고 하였다. 결국 참을 수 없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군사를 거병하기로 결정, 1298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리보니아 기사단으로부터 라트갈레를 탈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프루셀인이 쿠로니아 지역으로 쳐들어가 1300년 유르말라, 1305년 레제크네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리보니아 기사단은 10년 넘는 싸움에 지쳐 132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리보니아를 넘겨주고 튜튼기사단의 영지로 도주, 이로서 라트비아 지방과 에스토니아 지방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이 축출당하고, 이들은 다시 발트 민족의 땅이 되었다.

그룬발트 전투, 발트 역사의 분수령[edit | edit source]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민다우가스 이래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사실상 관례에 지나지 않은 위장에 불과했으며,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튜튼 기사단과의 충돌이 격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기독교로의 개종이 실질화될 천재일우의 기회는 갑작스럽게 왕가 계승을 위한 결혼 문제에서 왔다. 1386년, 당시 폴란드 왕국의 왕은 9세의 어린 나이였던 야드비가 여왕이었다. 당연히 피아스트 왕조의 혈통을 어떻게라도 이을 타 혈통이 필요했었던 상황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당시 대공이던, 故 알기르다스 대공의 아들인 요가일라(폴란드어 이름은 야기에우워) 대공이 결혼하겠다고 요청, 이에 요가일라 대공은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서 폴란드인들의 주선으로 기독교(그 중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수도 빌뉴스의 페르쿠나스 신전과 그 주변을 둘러싸던, 발트 신화를 신봉하던 성소를 뜻하는 로무바로 불리던 삼림을 죄다 밀어버리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완전히 마무리 지었다. 이와 동시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과의 동군연합과 이를 지배하는 야기에우워 왕조까지 출범시켰는데,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이와 같은 선택을 한 것에는 튜튼 기사단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폴란드 왕국의 귀족 문화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귀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최신 고급 문화로 비쳤던 점이 컸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서 발트 신화를 완전히 뿌리 뽑는데는 실패, 결국 발트 대봉기 이전까지 발트 신화는 카톨릭과의 이중 신앙으로서 융합되어 살아남았다.

그러면서, 그 직후 프레이가라 공국의 이제 막 왕위에 오른 프레이가라 2세(안시스 프레이가라)도 리투아니아의 소식을 듣고 프레이가라 공국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으나,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프레이가라 공국의 대개종-대부흥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튜튼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귀족들에게 유희를 이유로 개종을 가장한 이익 취득 행동 및 배신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리면서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와의 길고 긴 전쟁이 이어졌고, 프레이가라 공국과의 장기전을 겪기까지 하여, 그에 의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의 왕관 자리에 탐이 나 욕심을 부리면서 또 개종하는 척 한다고 의심하면서 전쟁을 지속하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프레이가라 공국을 계속 공격하였으며, 결국 튜튼기사단은 프레이가라 공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쳐 없애고 정복할 계획을 짜면서 철저히 이를 갈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야기에우워(요가일라) 왕은 리투아니아 대공직을 물려받은 사촌인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과 협정을 맺어 결속을 공고히 하였는데, 그 이면적 이유로는 당시 리투아니아군이 1399년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킵차크 한국에게 대패해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던 치명적인 사유가 있었기에, 동군연합을 유지하고 결속시키는 힘의 원천이던 동맹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튜튼 기사단 모두 철저히 칼을 갈면서 서로 싸우기만 했고, 결국 이 전쟁은 1407년 당시 기사단장 콘라트가 사망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는데, 당시 기사단장이던 콘라트가 죽기 직전 그의 동생 울리히를 차기 기사단장으로 지명해선 안 된다고 유언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울리히가 차기 기사단장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새 기사단장이 된 울리히는 본격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1409년 대군을 거느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프레이가라 공국의 요처를 공격하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프레이가라 공국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에 야기에우워는 바로 대응에 나서 튜튼 기사단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일단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그 기간 동안 양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서두르면서 최대한으로 끌어 모을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을 증강했다. 그러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당시 헝가리 국왕 지그몬드에게 황금을 보내면서 지그몬드가 이 연합군을 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보헤미아 왕국의 당대 종교개혁 운동인 후스파의 수장인 얀 지슈카를 끌여들이면서, 타타르 군대까지 포섭하였다.. 프레이가라 공국도 이 전투에서 자신들의 강역을 침탈하고 자신들을 사실상 동쪽으로 쫒아낸 간악한 침략자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처럼 국토를 회복하는 운동을 완수하고자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편에서 참전하기를 자청하였다. 결국 1410년 7월 9일,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군대와 프레이가라 공국의 군대, 몰다비아 공국의 지원군, 타타르족 지원병(!), 보헤미아인/모라비아인/러시아인 용병으로 구성된 반 튜튼 기사단 연합군이 튜튼 기사단국으로 진군하며 엄청난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면서 대대적인 역공의 서막을 올렸고, 튜튼 기사단국에서는 당시 기사단장인 울리히의 적군이 도브진(Dobrzyn) 쪽으로 접근하리라 파악하고 있었으며, 리투아니아군과 폴란드군이 다른 방향에서 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한 것을 기반으로 대비해 군대를 두 갈래로 분리시키며 일단 표면적 상황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시켜둔 상태였다.

하지만, 반 튜튼 기사단 연합군의 진군 목표는 당시 튜튼 기사단의 수도였던 마리엔부르크였고, 이 소식을 들은 기사단은 황급히 군대를 정비해 최종 방어선인 드레빈츠 강 유역 방어선을 강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반 튜튼 기사단 연합군은 드레벤츠 강을 지나기 위해 좀 더 동쪽으로 우회했고, 튜튼 기사단은 반 튜튼 기사단 연합군과 평행하게 드레빈츠 강을 따라 이동했으며, 그러다 강이 급격히 북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에서 튜튼 기사단은 드레빈츠 강을 건너 방어적인 대형을 취했다. 결국 튜튼 기사단은 그룬발트 마을 근처에, 반 튜튼 기사단 연합군은 탄넨베르크 마을에 진을 치면서, 튜튼 기사단은 습지로 둘러싸인 지점을 얻을 수 있었으며, 반 튜튼 기사단 연합군은 진을 친 곳으로부터 5마일을 이동하여 숲에 병력을 매복시킬 수 있는 지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이후, 당시 튜튼 기사단장 울리히는 요가일라에게 검 2자루를 보내어 도전을 요청했으며, 이를 작전의 본격적 시작으로 이해한 리투아니아 기병이 선제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에 튜튼 기사단군은 사정거리 안에 들어서자 석궁과 활을 발사하는 등으로 대응하면서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리투아니아 대공국군 기병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이에 사기가 오른 튜튼 기사단군은 이날 분전했으며, 결국 얼마 안 되어 리투아니아 대공국군 기병대가 패주했다. 이에 튜튼 기사단군의 기사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군 기병들을 추격하면서 폴란드군과의 접전에 돌입했다. 그 와중에 기사단의 전열이 흐트러진 것을 본 폴란드군은 좌측면이 노출될 위험에도 그대로 전진해 기사단과 전투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면서 양군의 기병대가 혼전을 거듭하는 와중에 폴란드 왕기가 탈취되기도 했으며, 이에 기사단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이들은 정작 요가일라는 후방에 있었단 점을 간과했다. 이에 다시 폴란드군이 다시 적을 밀어붙여 왕기를 탈환하였고 튜튼 기사단은 배후로 기병대를 진출시키기도 했으나 역시 요격당하였다. 이 때 일부 튜튼 기사단군의 병력이 폴란드군의 측면과 배후를 위협했음에도, 타이밍 좋게 리투아니아군의 일부가 도착해서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저지, 그에 리투아니아군을 추격하던 튜튼 기사단군은 갑자기 숲에서 폴란드군이 뛰쳐나오고 퇴각하던 리투아니아군이 방향을 돌려 응전하며 저돌적으로 무모하게 돌격해오자 기겁하여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바로 그 상태에서 곧 리투아니아 기병의 공격이 개시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당시 튜튼 기사단장 울리히는 예비대를 투입해 지친 군대와 교대했으며, 이를 알아챈 야기에우워(요가일라) 역시 최후의 예비대까지 투입하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튜튼 기사단 모두 양 국의 국운을 걸면서까지 전투에 나섰으며, 이에 울리히는 왕을 노리고 전투에 나섰으나, 이를 농락하는 듯이 추격대를 섬멸한 리투아니아 기병들이 갑툭튀하여 측면의 약점을 파고들자 기사단이 밀리기 시작, 기사단의 전열이 과도하게 밀집된 상태에서 폴란드 기병들이 기사단의 군대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기사단의 전열이 와해되었으나, 튜튼 기사단은 끝까지 싸워댔다, 이에 프레이가라 공국군 기병이 교통정리에 나서며 튜튼 기사단군을 격파하여 그룬발트 전투에 참여한 튜튼 기사단군 병력을 삭★제해버렸다.

결국 그 다음해 토루인 조약이 체결되며, 리투아니아는 사모기티아 지역을 완전히 수복, 도브리진 지역은 원래 주인인 폴란드에게 돌아가고, 프레이가라 공국은 굼비넨 지역과 인스터부르크 지역, 쾨니히스베르크 지역, 알란부르크 지역을 획득하고, 프레이가라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그 중에서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이로서 발트 역사는 크게 바뀌었다. 독일인들은 프레이가라 공국에 편입된 땅에서 보복을 두려워하며 상당수 떠나갔으나 일부는 잔류했고, 그 상당수가 떠나간 자리는 프레이가라인이 대체했으며, 프레이가라인 인구도 이를 계기로 인구증가 속도가 두배로 늘었다. 프레이가라 공국은 독일 지명의 프레이가라어 지명으로의 번역 및 교체와 더불어 수도 천도를 결심, 준비기간을 거쳐 1425년 수도를 쿤네그스가브스(쾨니히스베르크)로 천도하였다.

중세에서 근세로, 그리고 루블린 합병[edit | edit source]

그 이후 무서울 것 없이 발트해 남동 연안에서부터 흑해의 오데사 만에 이르기까지, 또 소폴란드에서 스몰렌스크까지를 장악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2세기에 달하는 동안 동유럽의 패자로 군림, 그러면서 튜튼 기사단을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결과로 결국 1454년~1466년 벌어진 13년 전쟁에서도 튜튼 기사단을 패배시키며, 제2차 토룬(토루인) 조약을 체결, 조약의 결과 기사단은 왕령 프로이센이라고 불리게 될, 서프로이센 지역과 동프로이센 서부 지역 중 에름란트(Ermalnd)라고 불리는 지역을 할양하였으며 이후 기사단장은 폴란드 왕의 봉신이 되고 기사단국은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이 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막강한 국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튜튼 기사단국은 독립을 계속해서 시도,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튜튼 기사단국의 독립 의지를 잠재우고 완전히 종속시키기 위해 1519년부터 1521년까지 2년 동안 튜튼 기사단국과 전쟁을 벌여, 튜튼 기사단에 대한 신성로마제국의 무관심을 이용하여 튜튼 기사단을 격퇴시키고, 이에 카를 5세와 가톨릭에 회의감을 품고 있던 튜튼 기사단 37대 기사단장인 알브레히트(Albrecht von Hohenzollern, Herzog von Preußen)가 1522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신교도들의 회의와 비텐베르크에서의 마르틴 루터와의 만남을 계기로 1525년 4월 가톨릭에서 루터교회로 개종,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에게 완전히 충성을 맹세하고 폴란드의 봉신국인 프로이센 공국을 수립하면서 세속화하였고, 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전성기에 유례없는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리가나 탈린, 쿤네그스가브스(쾨니히스베르크), 그단스크(단치히)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하던 독일인들을 전부 축출하는 것은 무모하다 생각했음에도, 결국 농노로 시름하던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추디-에스티인)들의 권익도 같이 보장하기로 결단, 이에 따라 농노들은 소작농으로 남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거 해방되며 도시민 아니면 자영농으로 변신하며 프레이가라인/폴란드인/독일인 농부들/도시민들/상인들과 교류하며 “비교적” 평등한 관계로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다만, 이미 1519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격문을 붙인 것을 시작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나며 기독교 내 신구교(카톨릭-개신교) 간의 분열이 격렬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그 속에서 카톨릭 신앙을 선택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독일인,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등의 카톨릭을 믿던 소수 민족에게서 일어난 개신교의 확산, 즉 개신교로의 대개종울 막지는 못하였다. 이후 단순한 동군연합으로 한계가 있단 것을 알게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마침 프레이가라 공국에서 프레이가라 6세 공작이 사망한 것을 알게 되자 마자, 프레이가라 공국에 전갈을 보내어 합병을 설득, 이에 따라 1569년 루블린에서 조약을 맺으며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프레이가라 공국을 합쳐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을 건국하였다.

이와 동시에 프로이센 공국은 같은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과 수 차례에 걸쳐 근친혼을 맺고 한 쪽의 대가 끊기게 되면 다른 한 쪽이 상속받는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하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여러 가지 개혁 정책들을 펼치며 점차적으로 서유럽과 같이 농노제를 완화시켜 나가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루테니아인들에게 펼쳤던 포용을 계승하면서 민족 간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정립하려 애썼으나, 모스크바 대공국이 러시아를 통일하면서 루스 차르국을 세우면서 당시 차르인 이반 4세(이반 뇌제)가 서진의 야욕을 품기 시작, 결국 루스 차르국은 1558년 이런 신구교 분열을 이용하여, "정교회를 믿는 같은 루스 동족을 신구교 분열로부터 지켜내겠다"는 명분을 꾸미면서 대군을 이끌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 중 리보니아라 불리던 에스토니아 지방, 라트비아 지방, 그리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루테니아 영토이던 스몰렌스크 지역과 비텝스크 지역이 많은 피해를 입고, 루스 차르국이 몽골군과 이반 뇌제의 영향을 받은 루스 차르국 군대로 하여금 점령지에서 벌인 야만적인 학살을 일삼자,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 독일인은 자경단을 만들어 점령지에서 러시아인과 타타르족이 같이 복무하던 루스 차르국의 군대를 축출하는데 힘쓰며, 이에 힘을 받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군대가 루스 차르국을 몰아낸 영토에 진주하며 1618년 데울리노 휴전협정을 체결해 전쟁을 끝냈으며, 때마침 이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후사 없이 사망한 2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를 이어 프로이센 공작이 되는 식으로 이 협약을 그대로 이행하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을 성립시키려는 엄청난 시도를 했으나, 폴란드 왕이 빠꾸(?) 없는 영지 회수를 선포해버려서 결국 무산되어 실패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왕국의 영토로 흡수되었다.

대홍수, 발트에도 몰려오는 위기의 암운[edit | edit source]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발흥에 오데사 만 일대의 남방 연안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그로 인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에 다가오는 위협을 감지한 이들에 의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이 생성되고 지그문트 2세가 자신의 이복누이를 왕위에 올리려는 계획을 완수하려고 차차 조치를 취하며 기회를 노릴 즈음에, 1572년 지그문트 2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여 야기에우워 왕가의 남계 혈통이 전부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폐문되었으며,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 내 강력한 왕가의 부재 속에 12세기 말부터 존재해온, 귀족들의 공동체이자 입법부인 세임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될 계기가 되었고, 이는 결국 국왕을 선거로 선출해 즉위토록 하는 선거군주제로의 전환을 의미, 이 때부터 국왕들은 세임에 의해 휘둘러지거나 아니면 세임과 대립해 국론을 둘로 나누는 우를 범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귀족층인 슐라흐타는 162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사회 개혁의 의지를 상실하고 현상유지에만 급급, 이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전성기가 끝나고 귀족들이 타락해가며 착취의 길로 가는 퇴조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에 러시아 제국과 스웨덴 제국은 호시탐탐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을 노리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현지 정교회계열 루테니아 귀족들이 안그래도 타타르-모스크바 이중 전선을 감당하지 못해 비틀거리던게 눈에 보이던 리투아니아 대공국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들을 보호해줄, 소위 더 큰 지원세력을 찾으면서 자발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지에서 폴란드 왕국의 영지로 넘어오는 등의 혼파망이 벌어지며, 그래도 그나마 나은 점이라곤 착취는 많아져 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민족 간의 그나마 대등한 관계의 성립으로 주도권을 잡은 폴란드인이 타 민족을 짓밟는 일은 없었단 것이다. 각 민족의 귀족층은 그대로 남거나 새로 생성되었으며, 착취 속에서 부르주아 계층의 생성은 지연되어만 갔다.

그 와중에 1640년대에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는 "자신의 군사적 지도력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카자크를 이용해 연방 남쪽 크림 칸국의 타타르들과 그 종주국 오스만 제국을 도발하고 오데사 만 일대를 탈환할 생각이었지만 "국왕이 쓸데없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입법부 세임의 반대와 어린 아들 지그문트 카지미에시를 잃은 슬픔에 그 계획을 잠시 미루다가 1648년 1월, 흐멜니츠키가 코사크의 자치적 회의기구인 시치의 회의가 열리는 장소인 호르티치아 섬을 경비하던 폴란드 군인들을 죽인 후 이 시치를 열어 폴란드에 맞서 봉기를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며칠 뒤에 열린 시치의 군사회의 라다에서 흐멜니츠키가 헤트만으로 선출되면서 대홍수의 막이 열렸다.

흐멜니츠키가 코사크를 통일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개시하자, 제정 러시아와 크림 칸국은 폴란드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눌 기회라 생각하고, 막후에서 흐멜니츠키와 동맹을 맺고, 흐멜니츠키를 전력으로 지원한다. 그럼에도, 폴란드 왕국은 전력을 다하여 마그나트의 편에서 흐멜니츠키 세력을 계속해서 물리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많은 파괴가 수반되었으며, 결국 흐멜니츠키 세력과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과 흐멜니츠키 세력은 1651년 베레스테츠코 전투 이후 휴전을 선택했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서는 이를 안 좋게 보았고, 그 결과, 1654년 제정 러시아는 이러한 휴전을 인정하지 않고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으로 쳐들어와 전쟁을 일으켰고, 빠른 속도로 쳐 들어가 연방령의 동쪽 절반을 점령하는 데 이른다.

이때,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상황을 들은 스웨덴은 16세기 말부터 스웨덴 내 왕위다툼과 연계되어 벌어진 양국간의 적대적 역사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을 손봐줄 때만을 기다렸으며, 이때를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을 손봐줄 때로 인식한 스웨덴은 1655년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을 침입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남은 절반을 점령했으며, 이에 맞춰, 얀 2세(카지미에시) 국왕이 예수회만을 지지기반으로 가진 채로 슐라흐타의 신임을 못 받은 점을 이용해, 야누시 라지비우와 보구스와프 라지비우를 비롯한 수많은 슐라흐타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정부와 체제를 붕괴시키며 나라를 팔아버리려는 데에 동조하려고, 스웨덴 왕이던 칼 10세(구스타브)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2개의 공국을 분할 및 독립시켜 라지비우 가에 건네주고, 남은 리투아니아 대공국령은 스웨덴의 괴뢰국으로 전락시키는 케다이네이 합병 등을 체결하고, 폴스카 왕령 내의 대법관과 재무장관 직을 맡은 이들이 칼 10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왕으로 옹립함과 동시에, 침공 직후 칼 10세에게 항복하고 영토의 통치권을 양도하려고 시도했으며, 그에 따라 얀 2세는 실레시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 프레이가라, 리투아니아에서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레지스탕스가 활발히 활동하면서, 저항운동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으며, 이들 저항운동의 중심이 되어 칼 10세에게 넘어가지 않고 얀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야스나 고라 수도원과 그 주변은 결국 공성전을 통해 스웨덴군과 나라팔이들의 하수인들을 몰아내며, 이들은 티쇼프체 연맹으로 뭉치면서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얀 파베우 사피에하를 중심으로 뭉치며, 전국적인 봉기를 통해, 제일 먼저 서쪽 반을 차지한 스웨덴군과 칼 10세에게 충성한 나라팔이들을 쫓아낸 다음, 러시아군을 겨우 드네프르 강 좌안으로 몰아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얀 2세는 르부프(리비우)에서 연방의 왕위에 즉위했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편에 선 트란실바니아와 프레이가라 내 소수 잔류 독일계의 후손의 반란군을 모두 물리치거나 쫓아냈음에도, 러시아를 드네프르 강 좌안 우크라이나에서 몰아내는 것은 힘겨웠다. 결국 스웨덴령 에스토니아를 연방이 다시 되찾아오는 것으로 스웨덴과의 전쟁은 끝났으며, 북방의 위협을 제거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그 이후에는 러시아와의 싸움에 모든 것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658년 하디아치 조약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은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루테니아 연방이라는 4족 연합으로 변화를 조건을 걸었고, 이반 비호프스키와 그를 따르고 있던 코사크의 지도층들인 스타르시나가 이를 매우 지지하며 동유럽의 국제관계를 크게 변화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해당 조약의 발효를 저지하려고 들었고, 전쟁은 계속된 끝에,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에서 제정 러시아를 겨우 몰아냈고, 결국 안드루소보 조약을 통해 스몰렌스크 지역을 제정 러시아에 넘겨주었으며, 대홍수는 이로서 완전히 끝났으며, 1683년 빈 전투로 인해 이슬람 세력의 진출을 다뉴브 강 이하로 축출하며 연방은 수십년 간의 평화를 얻어냈다.

하지만, 대홍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이 보장하던 종교적 관용의 종결을 알렸으며, 이를 통해 각 민족 간의 갈등과 귀족의 전성시대를 열게 되었고, 이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이 가지던 폐단은 더더욱 악화되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존재감을 알리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하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제정 러시아와 브란덴부르크 공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를 갈게 되었는데도 이를 해결할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국내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여러가지 개혁도 의회가 그 때마다 기능정지를 단행하거나, 귀족들이 의회를 통해 번번이 저지시키면서 실패로 돌아가버리고야 말았다. 이러면 이럴 수록 신구교를 막론한 주변의 기독교 신봉 국가와의 갈등이 커져만 갔고, 결국, 이는 1772년과 1792년 두 차례에 걸친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에 대한 강제 영토 탈취 시도, 소위 '폴란드 분할'로 이어진다.

폴란드 분할 속 풍전등화를 기회로 삼다 : 발트 공화국의 성립[edit | edit source]

그러한 갈등 속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존재는 눈엣가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브란덴부르크 공국과 제정 러시아, 오스트리아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을 분할해서 그 존재를 삭제하자고 작당, 1772년 제정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가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에 내정 간섭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곧바로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에서 위 3국이 영토를 탈취하면서 최초로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에 대한 강제 영토 탈취 시도(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지며, 브란덴부르크 공국에는 북부 대폴란드와 동포메라니아(그단스크 시를 제외한 그단스크 시 주변부 일원)과 에름란트와 그 주변이라고 할 수 있는 서부 프레이가라 지역을,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갈리치아-볼히니아 지역을, 제정 러시아에는 동부 벨라루스와 그 근처의 러시아인이 사는 지역과 드니프로강 좌안 우크라이나을 강제로 넘겨줬어야 했다.

이에 대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국왕은 폐단을 이번에 해결하고, 약한 힘을 키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을 짐작하여, 여러 가지 개혁을 밀어붙이고, 1792년 5월 3일 헌법을 제헌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을 입헌군주제 체제로 개혁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에 대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보수파들은 나라팔이를 또 다시 시도하여, 그들이 만든 타르고비차 연맹을 통해 러시아를 끌어들여 외환을 시도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을 러시아의 점령 하에 놓이게 만들었고, 결국 연방은 제정 러시아에게 벨라루스 지방의 나머지 지역과 드니프로강 우안 우크라이나를 강제로 내줘야 했으며, 브란덴부르크 왕국에겐 남부 대폴란드를 강제로 내줘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프랑스 혁명 때문에 이러한 분할에 불참했다는 점이다.

결국, 폴스카의 애국자 중 하나이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등이 저항 운동을 일으켰으며, 그 사이 민족 의식을 가지게 된 리투아니아인 애국자와 프레이가라인 애국자, 벨라루스인 및 우크라이나인 애국자들도 이에 호응하는 봉기를 벌이면서, 이들 애국자들을 중심으로 공화동맹이 만들어져, 폴란드 대봉기발트 대봉기가 발생하였으며, 이들은 1793년부터 1798년까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그대로 수용해 이를 발트화하며 지속적인 저항 끝에 2차례의 폴란드 분할을 무력화, 결국 1798년 이들 공화동맹이 만든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의 신정부와 위 3국 간에 맺어진 르부프 조약에 의해 두 차례의 폴란드 분할로 뺏긴 영토는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에게 돌아왔고, 그와 함께 오데사 만 연안을 비롯한 슬로보다 우크라이나, 볼호로드-보로네시-로스티프 지역 등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에 주어지고, 스말린스크(스몰렌스크) 지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에 복귀했다. 1799년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은 폴스카 제2공화국, 리에투바 제2공화국, 라트비야 공화국, 프레이가라 공화국, 벨라루스 공화국, 우크라이나 공화국으로 나눠지면서, 이들 공화국을 하나로 묶은, 폴란드-발트-좌우루테니아 공화국 연방의 결성을 통해 발전적으로 해체하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의 전화에서 제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edit | edit source]

제1차 세계대전, 무너질 줄 알았으나 다시 일어선 발트[edit | edit source]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리며 오헝제국의 후계자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양 동맹 간에는 긴장이 팽배해졌고, 오헝제국의 무리한 조건을 세르비아는 당연히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전쟁은 곧바로 러시아와 프랑스의 개입으로 확전되기 시작했고, 이윽고 제정 독일이 이에 대응해 개입하며 세계대전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결국, 이로 인해 제정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양 전선을 과대하게 확장시키며 수많은 국가를 짓밟았다. 그와 동시에, 발트 방면에서 이룰 수 없는 무리한 계획을 폴란드 분할의 실패에 대한 120년의 복수심 끝에 실행하려고 하는데, 그 계획은 바로 발트 공화국과 폴스카 제2공화국을 중심으로 수많은 중부 유럽에서 동유럽에 걸친 여러 공화국의 연합인 폴란드-발트-좌우루테니아 공화국 연방, 즉 신 폴란드-리투아니아-프레이가라 연방을 무너트리고 그 자리에 무수한 왕/공국들을 세우고는, 그들을 자신들의 외견상 봉신국 겸 보호국으로 만들어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장기적으로 지배하는 것이었다. 즉, 반동을 확립하려는 것이 그 계획이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수많은 나라를 침략해 쳐들어간 제정 독일은 발트 공화국과 폴스카 제2공화국을 무너트리고, 벨라루스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대한 침략에 돌입했다. 그에 따라 폴란드 섭정왕국, 리투아니아 왕국, 신 쿠로니아-리보니아 공국을 세우고, 튜튼 기사단국과 프로이센 공국의 재건된 후신으로써 프로이센 왕국을 건국, 발트 공화국과 제정 러시아와의 국경과 침략하여 점령한 벨라루스를 통해 침략하는 루트를 통해 제정 러시아의 영토로 쳐들어와 크게 싸우는 지속적인 소모전을 단행해 러시아 공산혁명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정 독일의 전세는 미국의 1차대전 개입 등으로 인해 확실하게 패망으로 기울었으며, 벨라루스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것에 실패하여, 결국 1918년 11월 초, 독일 제국에서는 전쟁을 끝내자는 것에서 시작해 제정을 붕괴시키자는 11월 혁명이 발생, 발트 지역과 폴스카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발트 공화국 및 폴스카 제2공화국을 복원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여, 그 결과로 독일의 11월 혁명이 독일 제국의 내부 붕괴로 인한 공화정으로 전환 및 독일 황제의 네덜란드로의 빤스런(?)으로 인해 성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망으로 끝이 났고, 기존 체제의 복귀는 수반될 수밖에 없는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 1918년 11월 11일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 크로아트-슬로베니아 공화국의 성립의 소식이 전해지는 등의 긍정적 소식이 들려오는 등으로 인해 사기가 올라, 결국 독일제국이 점령하여 만든 해당 봉신국 겸 보호국들은 11월 15일을 전후로 전부 내부붕괴되어 사실상 공화정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1918년 12월부터 이것이 공고화되며, 이전의 공화국 체제가 재건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의 본격적인 시작은 동년 12월 13일에 폴스카(폴란드)가 제2공화국의 체제를 복원하는 조건으로 공화정으로 전환하며 스타트를 끊었는다. 동년 12월 13일에 폴스카가 제2공화국의 체제를 복원하는 조건으로 공화정으로 전환한 것에 영향을 받은 나머지 국가들은 동년 12월 15일에 발트 공화국 재조직 겸 국가 통합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이듬해 1월 1일을 기점으로 실시하기 위해 통합 의회, 통합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여 발트 공화국 헌법의 효력을 부활시키고 이를 실시하는 일자를 발트 공화국 재조직 겸 국가 통합 조약의 실시 일자인 1919년 1월 1일로 지정, 1919년 1월 1일에 발트 공화국을 부활시켰다. 그 사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어떤 연방으로도 묶이지 아니한, 별개의 독립된 공화국으로의 독립을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민스크와 키이우에서 선언, 결국 1919년 3월 8일에 벨라루스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계승한 벨라루스 인민공화국대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성립되며 지금과 같은 국경과 영토를 확보, 폴란드-발트-좌우루테니아 공화국 연방의 복원까지는 성사되지 못한 채로 발트연방공화국의 전신인 발트 공화국은 어떤 뒷받침도 없이 국제사회에 홀로 서게 되었다.

전간기[edit | edit source]

또다시 침략의 길에[edit | edit source]

1939년 소련에서는 독소 불가침 조약에 기반해서 발트 공화국,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대우크라이나 공화국을 무너트리고, 각 국을 소련에 강제 가입시키면서 변경의 일부를 러시아 FSSR에 편입한 뒤에, 발트 SSR, 벨라루스 SSR, 우크라이나 SSR, 크림 SSR을 만들고, 프레이가라 지역은 나치에게 떼어다 주고, 폴스카 제2공화국을 나치 독일과 함께 분할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동 시기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게 포메라니아, 실레시아를 할양할 것을, 발트연방공화국에겐 프레이가라 지역과 리에투바 지역의 클라이페다 일원을 할양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쳐들어갈 것을 협박하고 있었고, 1938년 빈 합의가 무산되자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부터 주데텐란트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이 셋은 그에 맞서면서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동년 9월 중순에 소련은 발트 공화국,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대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침공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될 바엔 폴란드 편을 들며 나치와 소련에 맞서 싸우겠다고 선포,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건 혈투를 진행하게 된다. 로므니아 왕국과 남캅카스 3국[3]은 발트-벨라루스-폴스카-체코슬로바키아(체스코-슬로벤스카)-대우크라이나 5국의 편에 서서 소련과 나치와 맞서면서 역공을 가하고 있었고, 마자르 왕국은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게 해주겠다는 히틀러의 말만을 믿고 나치 독일의 편을 들어주며 참전했고, 이탈리아 왕국은 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이유로 나치 편을 들고 참전, 유고슬라비아는 쿠데타로 친독 내각이 무너지고 친연합군 왕정이 들어서며 헝가리로 쳐들어가고... 슬로베네-흐르바츠카-보스나 공화국도 마자르 및 이탈리아와의 마찰로 인해 연합군 편을 들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와 잉글랜드, 컴리, 알바, 에이레 공화국, 스페인, 카탈루냐 공화연방 등은 이를 진짜로 위급한 신호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노르웨이와 핀란드(수오미)가 추가되어 연합군을 꾸려 핀란드를 제외하고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로, 핀란드는 소련으로 쳐들어갔다. 결국 소련은 이에 기겁하며 1940년 10월 핀란드, 발트 공화국,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대우크라이나 공화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의 회귀를 통해 전쟁에서 빠지면서 한 시름 덜은 발트 공화국은 바로 나치 독일로 방향을 돌려, 1943년 5월에 베를린을 함락시키며 제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을 마무리 짓는다.

종전, 그리고 연방화[edit | edit source]

현대[edit | edit source]

정치[edit | edit source]

틀:발트연방공화국 행정부 틀:발트연방공화국 국회 의석 분포 발트 대봉기의 대성공으로 인한 다민족 민주공화국의 역사로 인하여[4] 하나의 수도와 그 주변 도시권으로 집중되어있던 권력을 분산시킨 사례로서, 그로 인한 여파로 수도 역시 하나에만 놓을 수 없어서, 민주의 여명 세계관 국가들을 둘러봐도 흔치 않은 다원수도제를 실시하는 국가 중 하나이며, 그때문에 리가에 행정부(대통령 관저와 중앙정부 청사)가, 탈린에 경제 중추 기능(각 기업 본사 및 각 다국적기업 지사)이, 쿤네그스가브스에 사법부(대법원)가, 빌뉴스에 입법부(연방의회)가 존재한다.[5]

지방자치의 경우에는 스위스의 칸톤(주(州)) 제도의 요소와 독일식 연방제를 혼합하여, 주 헌법 및 법률을 제정해, 연방 헌법 및 법률과 함께 적용함을 기반으로 주 정부 및 주 의회가 존재함과 동시에, 지역 공용어를 주지사 명령으로 직접 지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연방대통령의 경우에는 직선제로서 선출되며, 임기는 6년 단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벌어질 때마다 후술하는 지역정당들이 성향별로 꾸린 연합과 소수민족 대표 정당 등을 중심으로 7명~20명의 후보가 나와 각축전을 벌인다.

빌뉴스에 위치한 입법부는 입법부는 각 언어별로 불리는 이름이 다른데, 에스토니아어로는 리기코구(Riigikogu), 라트비아어로는 사에이마(Saeima), 리투아니아어로는 세이마스(Seimas), 프레골라어로는 세데툰라(sendētunla)라고 부르며, 의석은 350석 단원제이고, 전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차용하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발트연방공화국 수립 이래로 보수계 지역정당(보수국민당, 신보수당, 농민연합, 리에투바 기독민주당, 프레이가라 보수연합)과 자유주의 지역정당(통일당, 자유당, 연합당, 자유운동, 프레이가라 자유당), 중도계 지역정당(모두의 개발당, 중앙당, 개혁당, 리에투바 농민녹색연합, 프레이가라 민주당)과 진보계 지역정당(녹색농민당, 에슈티 사회민주당, 화합사회당, 프레이가라 농민당)과 그 외 폴란드계 정당(재 발트 폴란드인을 위한 선거운동), 러시아계 정당(발트 러시아인 선거명단), 독일계 정당(도이처-발티셰 민주운동)이 경쟁하면서 대통령제임에도 중도-자유주의, 진보, 보수-중도 연정 식으로 내각을 교체해왔다. 이러한 발트연방공화국의 정치 현실로 인해 대통령제의 보편적인 모습과는 간극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이원집정부제 도입 요구도 높은 편이다.

경제[edit | edit source]

전체[edit | edit source]

소련에 강제 편입되는 것은 면했으나, 핀란드와 함께 헬싱키 모델의 중립을 강제당해야 했던 와중에도 서구와의 밀접한 경제를 일구면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 서구를 잇는 문이 되려 노력했던 발트연방공화국은, 1990년대 초반에는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핀란드보다 10%정도 더 의존적이었던 상황에서 소련의 해체로 인해 구소련 출신 국가들의 경제가 급속도로 위축하는 상황에서, 비슷한 시기 라트비아 지방의 1990년 목재 대박 하나에 경제가 고도성장형 경제로 변화하였고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경제 기초체력 증진을 위해 노력해 산업 다각화 및 육성에 힘을 기울인 결과, 그 이후에도 10%대의 고성장을 기록하여, 2007년 국민소득 4만불을 달성, 코로나19 이전까지 연평균 7~9%대의 성장을 보였다.

그로 인해 발트연방공화국은 냉전이 사실상 종결되는 1989년 이후 다시금 유럽 국가들과 교역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게 된다. 대표적인 국가들이 북유럽권의 스웨덴과 핀란드, 독일어권의 독일, 주변 경제권에 해당하는 폴스카 공화국/대우크라이나 공화국/벨라루스 인민공화국 등 근처에 있는 힘이 있거나 구매력이 상당한 국가들과 교역 규모의 폭발적인 증가다. 그 결과 2000년을 기점으로 유럽 국가들은 발트연방공화국의 교역량에서 75%까지 비중을 차지하며 핵심 교역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많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대한민국에서의 과거 발트연방공화국의 발트화가 통용되던 시절의 발트화와 원화의 환율은 잉글랜드 파운드 스털링과 원화 간의 환율만큼은 아니었지만, 유로보다도 비싼 환율을 자랑하면서 사람들을 혼돈에 빠지게 했었다.[6] 그 상황에서 물가가 아주 비싼것도 아니고 유럽의 다른 선진국 및 열강 국가 대비 평균 임금이 엄청 높은 것도 아니어서 얼마 전[7]까지 국민 대부분이 동전지갑을 들고다니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현재는 유로화의 도입으로 인해 통화가 다른 국가들과 통일되며 화폐가치가 하향조정을 급격히 거쳐 안정화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예전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세계적으로는 경제적 영향력, 정치, 문화가 다른 발트해 남부 연안 국가들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인해, 발트연방공화국을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그 부속도서, 수오미-카리얄라-사미 지역이나 덴마크가 있는 윌란 반도 및 그 주변 부속도서에 위치하지 않았음에도 북유럽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발트연방공화국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소련 동쪽에 위치한 수많은 공산국가들(소련의 위성국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단행하는 물결을 이룬 이후에, 냉전으로 인한 중립국 시절보다도 더더욱 자국을 동구권과 서유럽을 이어주는 문으로 활용하면서 유럽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했고, 핀란드/오스트리아보다도 더 자체적이었던 중립 경제를 서유럽과 같은 교류가 많으면서도, 강하고 건실한 경제로 전환하고자 서유럽의 경제 체제를 본따 경제 개혁을 시작하였다. 1994년 밀턴 프리드먼의 이론에 기초를 두어 발트연방공화국은 일률 과세를 도입하였고, 세금을 30%로 동결하였다. 그리고 2005년 1월 이렇게 동결한 세금을 27%로, 2006년 1월 24%로, 마지막으로 2008년 1월 21%로 감축하였다. 물론 국가가 경제적으로 기초체력을 갖추면서 그 부강을 유지하게 된 대신에 서유럽 국가 이상으로 경제력을 지닌 사람들이 사회적 영향력 등의 힘을 그만큼 더 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발트연방공화국은 정부 공공부채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이기도 한다. 물론 2013년 기준으로는 좀 더 늘어서 10%가 넘어가긴 했으나, 그래도 유럽연합의 가입국 중에서도 유럽연합을 떠받쳐주는 상위권 국가에 들어가는, 말 그대로 유럽의 일원이라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2015년에는 잠시 9.3%로 하락하여 유럽에서 가장 재정이 건전한 나라임을 과시하기도 했으며 전망치도 썩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지역별[edit | edit source]

에슈티(에스토니아) 지역[edit | edit source]

에슈티 지역의 경우엔, 발트연방공화국에서 중앙집중도가 가장 높다보니 국내 총생산의 50%를 지역 중심지 탈린에서 생산해낸다고 한다. 2008년 기준 에슈티 지역의 일인당 총생산은 3만 7천 불 가량이지만, 지역중심지 탈린은 다른 지역보다 210% 높은 수치를 나타내었다. 이는 유럽 연합 평균 일인당 총생산보다 150% 높은 수치라고 한다. 실업률은 9.8%로 유럽 연합 평균보다 높으며, 실제 GDP 성장률인 5.4%보다 높은 수치이다. 산업적으로는,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발트연방공화국 정부뿐만 아니라 에슈티 지역에 해당하는 각 주/각 시 정부에서는 임업에 대한 규제는 심했어도, 유독 에슈티 지역의 정보처리 분야나 컴퓨터 공학을 장려 수준은 아니더라도 간섭하지 않았던 역사로 인해 정보통신 관련 산업이 발전하였다.

애초에 에슈티 지역은 공업과 농림어업이 같이 발달한 주로써, 정보처리 분야나 컴퓨터 공학에 대한 기초적인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이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정보통신 분야의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기에 에슈티 지방에서 나오는 막대한 기술 인프라로 인해, 이들 에슈티 지방의 정보통신 산업은 발트연방공화국의 IT기술의 토대를 단단히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 당시 컴퓨터 공학을 연구하던 남자들은 머리를 기르고 다녔는데, 이 때문에 현재에 와서는 긴 머리의 남자는 컴퓨터 공학도라는 인식이 에슈티 지역 곳곳에 팽배해 있다. 즉, 이들은 에슈티 지역, 더 넓게는 발트연방공화국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지는 산업역군인 셈이다.

라트비야(라트비아) 지역[edit | edit source]

라트비야 지역은 전통적으로 목재 산업이 발달하였다. 때문에 1990년 국제 원자재 시장에서 목재가격이 성장하며 대박을 기록하자, 에슈티 지역의 정보통신 산업과 리에투바 지역의 광업과 경공업/중화학공업/전자제품 제조업 등의 제조업을 통해서 유럽 평균 수준의 발전 정도와 경제 규모를 지닌 그냥 선진국 1에 불과하던 발트연방공화국의 당시 경제사정을 크게 뒤바꿔 놓으면서 라트비아 지역의 사회 및 문화, 출생률에 큰 영향을 주고, 사회적인 인구 감소가 사회적인 인구 증가로 역전되기까지 했다. 그 결과로 발트연방공화국에서는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에슈티 지역의 지속적인 첨단 산업 발전과 함께 코로나19 유행 이전까지의 30년 가량을 기록한 발트연방공화국의 고도경제성장에 기여하게 된다. 라트비야 지역은 1차산업 종 목재 산업 말고도 제약 산업의 비중도 높다. 라트비야 지방은 중세부터 제약 산업이 융성했던 전통이 있고, 이로 인해서 제약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 현재도 동유럽 및 북유럽 권역의 제약 시장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오죽하면, 다국적 제약 회사들의 발트연방공화국 지사는 경제수도 탈린 대신에 리가에 죄다 있다고 할 정도이다.[8]

리에투바(리투아니아) 지역[edit | edit source]

리에투바 지역의 경우에는 내륙에서 석회암, 토탄 등의 광물을, 발트해 연안에서는 석유를 채굴하는 광업이 발전했고, 빌뉴스, 클라이페다, 카우나스를 중심으로 경공업, 전자제품 제조업, 중화학공업이 골고루 발달하였으며, 그 외 농지들을 기반으로 농업과 축산업이 발달하였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는 금융산업과 부동산업, 교통 관련 산업이 발전하였고, 1980년대 이후로는 도/소매상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시간에 따라 서비스업의 발전 양상이 달라졌으나, 소비자 서비스업과 생산자 서비스업이 균형 있게 발달하면서 주요 도시를 기점으로 비약적인 경제 성장의 견인차가 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산업 균형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자, 발트연방공화국의 미래 발전의 열쇠이다. 그 외에도, 발트연방공화국에서 가동하는 몇 곳의 원자력 발전소가 존재하여, 발트연방공화국 곳곳으로 전기를 보내면서 발트연방공화국의 전력 수요에서 40%를 차지하고 있다.[9]

프레이가라 지역[edit | edit source]

전통적으로 독일인들이 중세 중반에 선교를 빙자한 침략을 통해 자신들의 식민지를 만들려다가 실패해 소수의 독일계와 함께 남기고 간 맥주 문화(...)가 오랜 시간동안 뿌리내린 결과로써, 맥주 등의 주류를 중심으로 하는 식음료 사업의 중심지로써 식료품 산업이 매우 발달해 있고, 독일을 필두로 한 게르만족 및 중세 시대 당시의 부패한 카톨릭과의 격전지였다는 이유로 인해 수많은 문화재와 역사기록이 남아 있어, 이들을 연구하는 직종이나 관광산업이 극도로 발달해있다.

하지만, 관광산업 자체가 불안정을 필수로 수반하는 사업이라[10], 이웃 국가의 사례를 보고 프레이가라 지역 일원에서 외국 자본 유치든, 창업 장려든 상관 없이 제조업을 유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이러한 제조업 경쟁의 결과로, 최근에는 쿤네그스가브스, 틸세제메 등의 대도시의 배후와 교외에 놓인 어느 정도 넓은 농지와 발트 해를 기반으로 하여, 식음료 산업과 연계한 식품 가공 제조업이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행정구역[edit | edit source]

발트연방공화국 행정구역도.png

발트연방공화국은 21개 도시주와 31개 일반주로 구성되어 있다.

에슈티(에스토니아) 지역[edit | edit source]

라트비야(라트비아) 지역[edit | edit source]

리에투바(리투아니아) 지역[edit | edit source]

프레이가라 지역[edit | edit source]

언론통신[edit | edit source]

교통[edit | edit source]

문화[edit | edit source]

국방[edit | edit source]

  1. 서술한 그대로, 사레마 섬과 히우마 섬은 발트 해 연안, 즉 발트연방공화국의 서해안에 있다.
  2. 2.0 2.1 로무바(Romuva)는 발트 신화를 신앙으로서 지닌 이들이 신을 숭배하던 성소였다.
  3. 사카르트벨로, 하야스탄(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4.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우가 발트연방공화국과 유사한데,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경우엔 1956년 건국 당시 잉청저우 섬과 그 외 섬들의 민족 분포가 매우 달라, 수많은 민족이 잉청저우 제도 연방 안에 존재하고 있어, 미국식 연방제나 단일국가 체제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권력을 분산하려고 독일식 연방제를 절충적인 제도로서 도입하였다. 물론 스위스식 연방제(집정부제)냐 독일식 연방제와 오권분립을 절충한 제도냐에서 굉장한 정치체제의 차이가 나긴 했지만 말이다.
  5. 다만, 삼권과 경제 중추 기능의 배치는 관행적이고, 탈린, 리가, 빌뉴스, 쿤네그스가브스 4개의 수도를 놓는 것만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6. 그 당시 원화-발트화 환율은 1발트당 1800원, 원화-파운드 스털링화 환율은 1파운드당 2200원, 원화-유로화 환율은 1유로당 1600원에 달할 정도였다.
  7. 그래봤자 발트연방공화국에서 유로화가 도입된 2015년까지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8. 대신에 문화예술 산업은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으며, 정보통신 산업이 빌뉴스 도시권과 에슈티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9. 다른 전력 공급원으로서는 스미트네와 클라이페다 시 사이의 좁은 수로의 물살을 이용한 조력발전이나, 리보니아 만의 해상풍력발전단지, 발트연방공화국을 이루는 4개 지역에 흩어진 화력발전소들이 있으며, 이들로부터 추가로 필요한 수요를 충당한다.
  10. 현실의 그리스를 생각하면 적당하다. 현실의 그리스가 유럽 재정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남유럽 4국가에 들어가는 불명예를 안은 이유도 관광산업의 불안정성을 고려하지 않고, 당장의 수입과 일자리에만 집중하여 대규모로 관광산업을 진흥하고, 제조업을 키우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된 부동산 버블에 대한 대책도 없이 대침체가 세계를 덮치며 그리스의 1990년대~2000년대 부동산 버블이 급속도로 꺼진 것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