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수이 협정

From 더 스토리즈 대피소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이 문서는 민주의 여명 세계관을 구성하는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대체역사 장르의 세계관인 민주의 여명 세계관을 구성하는 문서로써, 모든 것은 허구의 설정이나, 세계관 설정의 구성을 위해 일부 현실의 것을 변형 혹은 확대한 설정이 있을 수 있으며, 이 문서의 기여 및 그 철회에 대한 권한은 민주의 여명 세계관을 연재하는 미르체아 지우르지우에게 있습니다.
단수이 협정
유형 평화 조약, 독립 보장 조약
통칭・약칭 잉청저우 섬에 대한 주권 보장 조약 및 잉청저우 섬의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헌정기만 훈정으로부터의 해방 조약
서명일 1956년 7월 15일
서명장소 중화민국 타이완 성 타이베이 현 단수이 진(현재의 중화민국 타이완 성 타이베이 현 단수이 시)
서명자 장제스(將介石), 상야오광(尙堯廣),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조지 R. 앤더슨
발효일 1956년 7월 20일
가맹국
대리인 이스트코스트 임시의회국
언어 표준중국어, 대만민난어, 하카어, 광둥어(월어), 오어, 산둥관화, 한국어, 일본어, 류큐어, 영어, 잉청저우어
주요내용 잉청저우 섬의 독립, 국민정부와 중화민국군의 잉청저우 섬에서의 철수


단수이 협정(중국어: 淡水協定/Danshui Sieding[4], 영어: Treaty of Tamsui, 프랑스어: Traité de Tamsui, 일본어: 淡水協定/たんすいきょうてい)은 1956년에 체결된 조약으로서, 잉청저우 섬의 독립을 보장한 조약이다. 1956년 이스트코스트 독립 주민투표와 동시에 잉청저우 제도 연방 결성의 근거가 된다.

협상 시작까지의 역사[edit | edit source]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동아시아 부분에 대해서 중화민국이 만주, 타이완 섬 및 펑후제도, 잉청저우 섬을 영토로 수복 할 것을, 1919년에 을사늑약 이후의 한국과 일본 간의 조약 및 그와 관계된 조약들의 무효화를 통한 한반도의 독립과 대한민국의 건국을 확인한 조약을 맺으면서 확인한 한국의 독립 보장의 재확인, 미국이 필리핀 등의 일제에 대한 점령지를 회복하면서 필리핀 독립을 이행하며, 그에 따라 바시 제도와 이스트코스트를 수복하고, 바시 제도를 이스트코스트에 연합시킬 것을 확약받았다.

이에 대해,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간기 기간의 독일 철수 이후 모범이 되는 위임통치로 세계에 가능성을 보였고, 그에 따라 타 식민지 혹은 타 위임통치 지역과는 달리 잉청저우 섬의 위임통치를 전후에 재개하면서 독립을 이행해야 한다는 자유 프랑스 측의 반발이 있었음에도, 중화민국의 모순 지적을 통한 묵살로 연합국 간의 협의인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을 밀어붙이게 되었다. 그에 따라 중화민국에서 국민당과 국민혁명군은 잉청저우 섬을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10월 25일에 중화민국이 대만을 접수한 다음날인 1945년 10월 26일에서야 일제 잉청저우 점령방면군의 항복을 받아 점령하였으며, 돌아온 위임통치령 정부에 대한 처리 문제로 인해, 점령 직후 프랑스와 저우산 협정을 맺고, 중화민국이 잉청저우를 접수한다.

그 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싸운 국공내전 당시에, 국민당과 중화민국 정부가 화북에서 밀리는 과정에서, 공포에 휩싸인 광둥, 산둥, 저장-장쑤-상하이 출신의 민간인이 도합 400만명 정도 잉청저우 섬으로 몰려들었고, 그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점령지의 곳곳에서, 또 버마 등지에서 탈출에 성공한 패잔병 100만명이 잉청저우 일대로 몰려들며 외성인 집단이 대규모로 형성, 그와 동시에 벌어진 점령 정책에서 잉청저우를 강제로 중국화 하려고 시도, 결국 본성인들이 차별을 받으면서 제정 일본 점령 하와 같이 다시 억압받기 시작한 상황에서, 잉청저우의 일본인들과 류큐인들은 집단으로 귀환을 거부하며 집단으로 본성인으로 위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대만 타이베이에서 2.28 항쟁의 발생으로 대만인과 잉청저우인 모두의 설움이 폭발하여 2.28 항쟁이 대만을 넘어 잉청저우 섬까지 확산되었으며, 이에 대해 국민당과 국민혁명군은 2.28 항쟁을 이끌던 시민들이 세운 수습위원회의 안건을 모두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뒤로는 진압을 가장한 유린을 준비했고, 그 결과 수많은 민간인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으며, 결국 외성인과 본성인으로 분류되던 잉청저우 선주한족-신 본성인이라고 불리던 본성인 위장 일본인-잉청저우 원주민(잉청저우인), 즉 비 외성인 간의 갈등이 깊어져 갔으며, 이는 수차례 열린 대규모의 시민들의 독립 봉기로 이어지면서 독립 여론에 불을 지펴버렸다.

그러나 대만과 잉청저우 섬의 역사는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 중에서 현대 시대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본래 잉청저우 섬이 대만과 역사적 궤적을 같이 했던 하나의 지역이었음에도, 근대사에 돌입하면서 청의 손을 떠날 때 식민 통치를 받게 된 국가가 달랐다. 가령, 대만은 제정 일본에게 식민지배를 받았으나, 그와 달리 잉청저우 섬은 제정 독일의 식민지배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제정 독일의 패배 여파로 국제연합의 결정 아래 프랑스에 할당되어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고도의 자치권을 지닌 위임통치를 받았었다가 제정 일본의 침략전쟁에 의한 침탈과 그에 맞서싸운 역사가 있었다.

결국, 그에 따라 독자적 의식이 훨씬 강하게 자리잡은 잉청저우 섬과, 독자적 의식이 본격적으로 태통한 대만 간의 미세한 역사적 차이, 상당한 문화적 차이가 발생했으며, 이러한 미세한 역사적 차이는 프랑스의 잉청저우 섬 위임통치의 방향에 따라 더 커지면 더 커졌지, 위축되지 않았다. 결국 이스트코스트의 독립 여론과 맞물려 연방화 독립 방안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지지가 급증하는 등의 독립 여론의 강화 및 격화는 계속되었고, 잉청저우는 중화민국의 골칫덩이가 되어갔다.

그에 따라 1953년 10월 26일, 중화민국군의 잉청저우 섬 점령기념일에 국민당을 규탄하고 독립을 외친 10.26 항쟁이 발생, 순식간에 잉청저우 섬 전역으로 항쟁의 기운이 퍼졌고, 국민당군과 항쟁 시위대 간 유혈분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국민당군의 전쟁범죄에 준하는 수준의 유혈진압이 지속적으로 시도됨에도 계속 추진되었으며, 1954년 중화민국의 국민정부는 백기를 들고 독립협상을 시작했다.

체결 과정[edit | edit source]

1954년 6월 23일에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이 백기를 들면서 그 다음달 14일에 첫 협상이 난징에서 시작되었다. 첫 협상 때는 중화민국 측에서 잉청저우 섬의 대표자로 나온 당외들에게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무상차관과 식량지원을 돕겠다고 했으나, 잉청저우 섬의 대표자로 나온 당외들은 이에 대해 2.28 항쟁과 10.26 항쟁에서 국민당군이 벌인 전쟁범죄를 자체 집계한 결과를 들고 나와, 그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결국 첫 협상은 결렬되었다.

1954년 12월 9일부터 1955년 2월 2일까지 상하이에서 2차 협상이 있었고, 중화민국 측에서 잉청저우 섬의 대표자로 나온 당외들에게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무상차관과 식량지원을 돕겠다는 점은 다름이 없었으나, 진심어린 사죄를 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혀, 협상은 급격히 힘을 얻는 듯 했다, 하지만, 1955년으로 넘어옴과 동시에 중화민국군 측에서 반발을 표명하면서 협상은 극도로 힘이 빠져 줄다리기 국면으로 전환, 이 역시도 결렬되고야 말았다.

이러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 대치하다가는 죽음 뿐이라는 공감대를 지닐 뿐이었던 잉청저우의 당외들과 중화민국은 미국에 중재를 요청, 결국 미국의 중재로 샌프란시스코에서 1955년 5월 7일부터 1955년 10월 1일까지 3차 협상이 이뤄졌다. 당시 협상에서 중재자였던 미국에서는, 미국의 이익이 최대한으로 보장되면서 공산 세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하고자, 잉청저우 측에 중화민국 측의 주장을 모두 따라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으나, 당외들이 모두 거부했다. 결국 이도 결렬되었고, 잉청저우 섬의 당외와 독립 여론 앞에는 가시밭길, 아니, 어쩌면 강요된 죽음과 소멸만이 남는 듯 했다.

그러나, 상황은 1956년으로 넘어가면서 역전되었다.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마침, 이스트코스트에 제2차 세계대전의 복구로 인하여 미뤄진 필리핀 식의 독립 이행과정이 전후복구의 완수와 동시에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고, 전후 이스트코스트 시민의 애향심이 독립 촉구의 원인으로 바뀜으로 인해서 독립 여론이 꾸준히 높아지던 상황에서 1956년 3월 20일 이스트코스트의 독립을 결정짓는 주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의 찬성을 통해서 독립 쟁취를 확정짓고, 동년 5월 9일에는 미국 의회에서 "이스트코스트 및 바시 제도 속령에 대한 독립기본법"의 통과로 독립에 성공한 상황에서 잉청저우 섬의 당외들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고, 1956년 6월 1일에 대한민국의 3.1혁명을 모방하여 잉청저우 섬 전역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며, 다시 한번 항쟁의 추진력을 최대로 높였다.

이 사실들이 중화민국 곳곳과 세계 만방에 전해지며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궁지에 몰렸고, 결국 이스트코스트가 낀 채로 4차 독립협상이 단수이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결국 중화민국 측은 잉청저우 섬의 당외들이 요구한 그대로를 받아들였고, 배상금으로 254억 중화민국 위안이 책정되었다. 이를 협정 결과로 하여, 1956년 7월 20일 공식적으로 체결하였다.

결과[edit | edit source]

체결된 단수이 협정은 1956년 7월 20일 서명이 완수된 직후 곧바로 비준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비준을 취소 혹은 미비하지 않을 것이란 신뢰 속에서 잉청저우에서 발빠르게 집행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과 류큐인들은 위장을 풀고 본래의 문화를 다시금 누렸고, 그와 동시에 잉청저우 임시정부를 1956년 7월 22일 수립하면서 잉청저우 임시공화국과 이스트코스트 임시의회국의 연방제 통합 과정이 시작되었고, 결국 1956년 8월 3일에 중화민국의 국민대회 및 입법원에서, 그 다음날 미국 의회의 상원에서 단수이 협정이 비준되었으며, 1956년 8월 9일 이스트코스트와 잉청저우 양국에서 단수이 협정이 비준됨과 동시에, 양국이 통합하면서 잉청저우 제도 연방 임시정부 및 임시입법원이 수립되며, 연방 수립 과정으로 넘어갔다.

이로서 잉청저우의 중화민국과 관련된 역사 문제가 해결되고, 프랑스의 의도대로 잉청저우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로 인해 큰 파장을 낳으면서 반장제스 민주주의 회복 여론이 격화되었으며, 그 결과로 1960년 장제스가 하야함과 동시에 중화민국의 훈정이 종식, 헌정의 본격적인 실시를 통한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단수이 협정의 여파로 인한 갈등이 해결되었다.

각주[edit | edit source]

  1. 당시 이스트코스트 임시의회국은 단수이 협정 이후 독립된 잉청저우 섬과 연방을 형성하려고 하였고, 그러하여 결국,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협정에 서명 및 비준했다. 결국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형성으로 이는 모두 이루어졌다.
  2. 잉청저우 섬의 독립투쟁을 주도한 당외들이 단수이 협정을 위해 당외의 대표자들을 모아 1953년에 만든 독립운동 단체로, 단 2주동안 존속한 잉청저우 임시정부를 거쳐, 이스트코스트 임시의회국과 함께 잉청저우와 이스트코스트를 통합한 잉청저우 제도 연방의 모태 중 하나가 된다. 민간에서는 때때로 잉청저우 당외연합이라고 불리었다.
  3.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잉청저우를 위임통치하였다. 이에 더해,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잉청저우를 식민통치한 독일로부터의 위임까지 받은 자격을 추가하여 해당 협정에 참가했다.
  4. 이미 정착된 표기인 Tamsui로도 써서, Tamsui Sieding이라고도 쓴다.